스탠리 큐브릭의 1980년 작 〈샤이닝〉. 그 영화 속의 오버룩 호텔. 그중 한 복도에서 시작되어 무도회장에서 울려 퍼지다 붉고 깨끗한 화장실까지 이어지던, 1920~1930년대 무도회장 음악들. 영화 속에서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흘러나오는 이 음악들이 남긴 여파에 대해 생각해 보자.
무도회장 시퀀스에서는 하이와 로가 곱게 깎인, 알 볼리 먼지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노래가 관리인 잭이 발을 들인 무도회장에서 들려온 것인지, 그의 머릿속에서 들린 것인지, 혹은 수십 년 전의 관리인이 들은 것인지, 그게 영화 내화면에서 들려온 것이긴 한지 조금은 불분명하다. 음악이 울리는 공간만큼이나 그 시간도 모호하다. 1980년의 잭은 “당신은 언제나 관리인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1970년대의 관리인 그레이디를 만나지만, 무도회장의 손님들과 음악은 1920년대에 머물러 있다. 시간이 두어 번 접혀 있는 것 같은 이 시퀀스에서 ‘더 케어테이커’의 일이 시작된다.
〈귀신 들린 무도회장의 선별적 기억Selected Memories from the Haunted Ballroom〉은 제임스 레이랜드 커비가 1999년 ‘더 케어테이커’라는 이름으로 낸 첫 음반이다. 〈샤이닝〉이 나온 지 20년째 되던 해에 나온 그 음반이 영화의 프리퀄인지 시퀄인지 스핀오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에는 오버룩 호텔의 무도회장에서 맴돌았을 법한 음악, 알 볼리, 러스 모건, 할 켐프 등 1920~1930년대의 가수들이 노래한 옛 무도회장 음악이 있다. 충분히 낡았지만 그래도 들을 만한 음반을 듣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 음악. 그러나 동시에 누군가 들은 음악을 듣는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 조금 찜찜할 따름이다.
구조적 듣기, 환원적 듣기, 인과적 듣기, 깊이 듣기, 관조적 듣기, 수동적 듣기······. 듣기에는 꽤 여러 양상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기대하는 최상의 듣기는 ‘동일시하여 듣기’다. 음악을 들을 때 운이 좋다면 스스로 가상의 에이전트가 되어 그 음악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겪으며 승리의 도취감, 파괴의 기쁨 같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 음악의 내화면으로 들어가 작은 단위, 아마도 모티브, 움직이는 선율 그 자체, 이들을 엮어 만든 어떤 덩어리, 또는 끊임없이 자기 모습을 바꾸어 특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 보는 과정에서 느끼는 일들이겠다. 음악을 만든 이의 마음에 들어앉은 것 같다는 착각을 즐기며 음악가에게 동일시하는 일도 가능하겠다.
더 케어테이커는 분명한 동일시의 감각을 주지만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데, 그건 동일시의 대상이 음악도 음악가도 아닌 음악을 들은 ‘청자’이기 때문이다. 음악 속에서 ‘나’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기억 속에 맴돌던 음악을 듣고, 나는 ‘나’에 귀를 겹치기만 하면 된다. 〈샤이닝〉 속 관리인의 운명이 이미 마련되어 있는 것처럼. 음악은 꼭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지난 일들은 내가 다 준비해 놨어. 그게 네 기억은 아니지만, 괜찮지? 다 끝난 음악 속에 있자. 호텔의 홀에서는 크루너들의 노래가 들려오지만 미로 정원에는 〈겨울 나그네〉가 있어. 좋아하던 음악이잖아. 아직 쓸 만한 음반들이고 한참 더 들을 수 있어. 이렇게 계속 듣는다면 언젠가는 네가 대신 기억할 수 있고, 기억한다면 살아 있을 수 있고, 머무를 수 있어.
다른 사람이 들은 것을 듣기. 혹은 다른 사람이 되어 듣기. 영화에서 삐져나온 듣기의 한 방식이라 이해되는 이 일은, 영화에서 음악이 하던 일을 음악이 혼자 해내는 것처럼 보일 때 발생한다. 처음엔 마땅히 내가 듣는다고 여기지만 음악이 이끄는 대로 같은 구간을 거듭 들으며 점점 강화되는 기억을 즐기다 보면 어쩌면 그것을 듣고자 한 것이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내가 아니라면 누구지? 스크린 속에 잠시라도 스쳐 지나갔던 인물 중 하나. 어쩌면 〈샤이닝〉의 마지막 장면에 잠시 나타나는 1921년의 단체 사진에 있던 이들 중 누군가. 혹은 푹신한 소파에 앉아 칵테일을 마시다가 그대로 몇십 년을 머물러 버리게 된 무도회장의 손님들. 사람들 틈에 섞여 있지만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한자리에 앉아 음악을 듣고 듣고 또 들으며 기억을 더듬는다. 나는 음악 속에서, 그들이 듣는 것을 엿듣는다.
하지만 그 엿듣기는 반대 방향으로도 힘을 발휘한다. 내가 밖에서 엿듣고 있다는 감각이 강해질수록 안에서 듣고 있던 ‘청자’의 자리가 함께 또렷해진다. 내가 엿들음으로써 밖이 형성되고 그 결과로 안이 만들어지듯이. 그런데 안에서 듣는 자들은 여전히 엿듣는 나와 함께 나의 환상 속에, 그러니까 이미 나의 내부에 들어와 있다. 어쩌면 음악은 귀벌레를 심어 두기 위한 빌미일 뿐, 더 중요한 건 누군가 그 귀벌레를 타고 들어와 내 몸을 빌려 들을 수 있도록 내 안에 다른 ‘청자’의 자리를 만드는 일이었던 것 같다고도 느껴진다. 내가 가짜 노스탤지어를 망상한 게 아니라 누군가 내 몸을 이용해 회고를 즐기는 것처럼. 그 음악 속의 청자가 내게 기생해 듣는다. 듣기의 문제를 이렇게 꼬아 이해해도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기이한 감각은 이것이 영화의 방식으로 들리지만 영화 없는 음악이라는 데서 온다. 화면도, 화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 누구도 없기 때문에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다른 누가 듣고 있다는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함께 듣는다. 기억이 남아 있는 한 계속.
영화가 끝난 지 20년째 되던 해에 ‘더 케어테이커’가 되기를 자처하며 오버룩 호텔을 돌본 더 케어테이커는, 20년을 꼬박 지나 보내고 긴 시간을 들여 그 일을 그만두기로 한다. 장장 여섯 시간짜리 음반 〈시간의 끝 모든 곳Everywhere at the End of Time〉은 음악 속에 있던 ‘나’가 기억을 모두 소진함으로써 마침내 끝에 이르는 과정을 들려준다. ‘더 케어테이커’라는 음악가의 마지막이지만 음악 속에 있는 ‘나’의 끝이기도, 이제는 나의 일부가 된 ‘나’, 청취자-에이전트도 함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기도 하다. 들어도 들어도 손에 쥘 수 없다고 느껴지던, 계속해서 엿들어야만 했던, 아무리 몰입해도 ‘나’와 불화하던 음악이 깨끗이 사라진다. 이후로는 더 케어테이커를 듣고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감각에 휩싸이지 않는다.
문제는 그렇게 ‘나’가 죽음에 이르고 난 후의 일이다. 누군가가 본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영화가 내게 가르쳐 준 아주 단순한 사실이고, 매개된 소리를 듣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다. 누군가가 들은 것을 들을 수 있다. 나아가, 누군가가 되어 들을 수 있다. 도약하여, 내가 누군가를 대신해 듣는다······. 이 가능성들은 다른 모든 듣기에 대해서도 의심의 씨앗을 심어 둔다. 내가 누구의 귀를 빌려 듣고 있는지. 혹은 지금 나의 귀를 빌려 듣는 이가 누구인지. 왜 음악에서 그것을 충분히 의심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가 되어 듣기를 즐긴다면, 그 누군가와 나 사이의 불화를 어떻게 이해할지도.
영화 × 음악
스탠리 큐브릭, 〈샤이닝〉(1980)
더 케어테이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