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아파트가 조용하다. 경보음이 울린다. 눈을 뜨고 어둠 속에서부터 휴대 전화를 더듬는다. 화면의 불빛이 얼굴을 비춘다. 안심하고 다시 눈을 감는다. 코로나와 계엄 등을 거치며 우리는 재난 문자라는 형식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안전 안내 문자나 나와는 크게 관계없는 긴급 문자를 읽지도 않고 밀어 넘긴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경보음이 울리고 문자를 확인하기까지의 그 찰나, 아직 내용을 읽지 못한 몇 초간의 긴장에 둔감해진 사람은 드물다. 카카오톡 알림이나 문자 메시지는 익숙한 진동 패턴과 알림음으로 도착한다. 손이 알아서 움직일 만큼, 그 소리의 체계 안에서 우리는 안전하다. 재난 문자의 경보음은 그 체계 바깥에서 온다. 순간적인 진동음이 아니다. 쨍하는 큰 울림과 함께, 내 이웃의 집에서도 울리는 것만 같은 여러 진동이 동시에 울리는 공포스러운 경험이다. 우리는 평온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잠깐의 소리만으로도 붕괴할 수 있는 위태로운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형섭의 〈긴급 재난 문자〉는 그 예기치 못한 소리가 주는 당혹스러움을 장르로 포섭하는 영화다. 한국 단편영화라는 조건 아래 SF 재난 장르를 구축하는 시도는, 짧은 시간 안에 영화 속 세계를 관객에게 더 납득시켜야 한다는 문제를 떠안는다. 장편 재난 영화는 전조와 징후를 보여 주고, 사회적 혼란을 그리고, 그 안에서 인물의 선택을 배치할 여유를 지닐 수 있지만, 17분의 단편에 그 모든 것을 배치하려면 경제적인 선택이 필요하다. 특히 SF를 단편으로 만드는 경우가 그렇다. 관객이 ‘이것은 우리가 아는 세계가 아니다’라고 받아들이려면 화면 위에 그 세계를 구축해야 하는데, 시간과 자본이 한정된 단편에서 이 제약은 감독의 역량을 시험하는 무대가 된다. 〈긴급 재난 문자〉는 그 무대 위에서 영리한 선택을 한다. 재난의 실체를 보여 주는 대신, 재난이 도착했다는 신호만으로 장르를 성립시킨다.

 

아파트 창 너머로 물드는 주황빛 조명은, 한 번도 외부를 직접 보여 주지 않으면서도 바깥 세계가 이미 변해 버렸음을 느끼게 한다. 외계인의 형상도, 파괴된 도시의 풍경도 없이, 창문이라는 프레임과 색온도의 변화만으로 SF적 세계가 성립한다. 그리고 그 시각적 장치 위에 경보음을 포갠다. 스크린 속 민준이 그 소리를 듣고, 객석의 관객도 같은 소리를 듣는다. 극장 안에서 경보음이 울리면, 그것은 영화 속 소리인 동시에 관객 자신의 기억이다. 그 기억이 스크린 속 세계를 관객의 일상과 겹쳐 놓고, 재난 그 자체를 비로소 SF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다. 그런데 〈긴급 재난 문자〉에서 경보음은 세계의 위기만을 알리지 않는다.

 

가정에서조차 심하게 소심했던 민준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엇이 지구로 당도하고 있는지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경보음이 울리는 순간, 부부 사이에 잠겨 있던 비밀과 함께 민준이 말하지 않고 버텨 온 것들마저 한꺼번에 터진다. 세계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와 관계의 균열을 드러내는 신호가 동시에 도착한다. 여기서 재난이란 사건은 침묵을 가장한 회피를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말하자면 〈긴급 재난 문자〉는 장르의 관습에 기대면서 동시에 주어진 조건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차례차례 보여 준다. 이 단편의 재난은, 결국 한 사람의 선택으로 수렴한다. 그 선택이 무엇인지는 직접 확인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