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첫 장면, 골목길에서 이어폰을 끼는 중학생 예진의 클로즈업 숏이 보인다. 카메라는 점점 예진에게서 멀어지고 버스트 숏이 되었을 때 예진은 골목길을 나가 등교한다. 카메라는 패닝해 예진을 따라가다가 예진, 곧 프레임을 벗어난다. 패닝 후에 보이는 장면은 이 숏의 시작과 완전히 다른 세계다. 시작은 홀로, 골목길에서, 화면을 메우던 예진의 얼굴이었는데 골목길로 나가자 등교하는 수많은 학생이 보이고 마을의 풍경과 어르신들이 보인다. 혼자였던 예진이 타인과 타인의 세계 속으로 던져지는 감흥을 준다. 세상 속의 개인. 그것은 비밀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다. 타인이 존재하는 세상이 없다면, 혼자라면 비밀은 필요하지 않다. 세상이 있어야 비밀이 존재하는데 비밀의 속성은 우습게도 그 세상과 불화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반작용인 셈이다. 세상은 비밀의 존재 조건이고, 동시에 비밀은 세상과 불화하는 개인이 안전히 존재하기 위한 보호구이다. 세상과 비밀이 이토록 첨예하게 맞물려 있기에 예진은 갈팡질팡한다.

 

예진은 친한 친구 해리가 다른 반 아이들과 비밀 일기를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리의 책상 서랍에서 본인이 빌려준 책을 꺼내다가 해리의 비밀 일기를 떨어뜨린다. 그 바람에 일기장에 걸려 있던 자물쇠가 떨어진다. 그리고 예진은 비밀 일기장을, 아니 비밀 일기장의 겉표지를 본다. 다음 신은 예진이 해리와 쭈쭈바를 먹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둘은 다른 쭈쭈바를 먹으며 각자의 꽁다리를 나눠 준다. 다음 장면, 교실로 돌아온 해리가 비밀 일기장이 없어진 것을 알고 예진의 가방을 뒤지려 한다. 예진은 제지하고 선생님에게 둘은 불려 간다.

 

영화의 끝까지 나오지 않는 장면들이 있다. 예진이 해리의 비밀 일기장을 보았는지, 혹은 보지 않았는지, 가방에 넣었는지, 혹은 넣지 않았는지가 나오지 않는다. 해리의 비밀 일기장 속 내용은 무엇인지 역시 나오지 않는다. ‘나오지 않음’은 적극적인 ‘보여 주지 않음’이다. 나아가 ‘보여 주지 않음’은 비밀을 지켜 주는 연출이다. 비밀을 알아야만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르는 채로 지킬 수도 있다. 이 연출을 통해 관객은 예진의 비밀을, 해리의 비밀을 모르는 채로 지켜 주는 위치에 놓인다. 또한 영화는 보여 주지 않음으로써 예진이 선한지 악한지 판단할 수 없게 한다. 사실은 생략하지만 진실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 타인의 비밀에 대해 함부로 알거나 단정 지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 개인은 다른 이들이 아는 무언가를 모를 때 불안해진다. ‘모름’은 ‘뒤처짐’이 되고 낙오라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사회는 ‘모름’을 미성숙의 상태로 규정하기도 하는데 이는 청소년을 대하는 편협한 관점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때로는 안다고 한들 모를 수 있고, 모를지라도 충분히 성숙할 수 있다. 모르는 것은 대체로 게으르거나 수동적인 상태로 받아들여진다. 한데 영화는 적극적으로 모르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모름에 대한 인식을 뒤집는다. 앎은, 특히나 비밀에 있어서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인지보다 어떻게 지킬지가 중요하고, 연출은 그 방법으로 ‘모름’을 제시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예진은 학교 운동장에서 홀로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꽁다리를 나눠 먹을 해리가 없다. 하지만 수일 내로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다시 마음을 열고 꽁다리를 나눠 먹게 될 것이다. 러닝 타임 이후의 시간은 영원히 알 수 없지만 그러리라 믿는다. 앎보다 강한 것은 믿음이라고 영화가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모름’은 믿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