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Fantasy
감독 이사벨 팔리아이Isabel PAGLIAI | France | 2025 | 79 min | Fiction | 국제 경쟁International Competition
어두운 기차 안,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노란 노트를 펼쳐 그 안에 적힌 문장들을 소리 내 읽는다. 잠시 후 여자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기차 안보다 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녀는 낮고 구슬픈 목소리로 나는 아프다고, 당신은 내 언어를 앗아 갔다고 흥얼거린다. 그러다 돌연 노래가 끊기고, 다시 남자가 그녀의 노트를 읽기 시작한다. 우리는 루이즈를 만나기도 전에 페이지마다 빼곡히 적힌 그녀의 내밀한 욕망과 두려움을, 이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다. 루이즈는 주로 동굴처럼 어둡고 텅 빈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그 집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집의 내부 역시 온전히 보이지 않는다. 루이즈가 처음 그 집 밖으로 나올 때, 루이즈는 그림자로만 나타난다. 어쩌면 루이즈는 아직 세계 속에 온전히 존재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판타지〉의 도입부는 이 영화가 취하는 방식을 미리 압축해 보여 준다.
콘크리트 바닥에 내리쬐는 뙤약볕 위로 드리운 검은 그림자처럼, 〈판타지〉에서 빛과 어둠은 항상 교차한다. 스마트폰 화면의 차갑고 날카로운 빛이나 한밤중 캄캄한 숲에서 핀 모닥불, 담뱃불이 발하는 희미한 빛은 루이즈의 얼굴을 밝히는 동시에 프레임 안 빛이 닿지 않는 공간을 더 강조하는데, 그 어둠 속에 더 많은 것이 잠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는 루이즈를 포획하거나 그녀의 영토를 점유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 없다. 루이즈는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파편적인 정황으로, 흔적으로만 ‘등장’하니까. 말하자면 이 영화는 환유법으로 쓸 수밖에 없는 시의 논리를 따른다.
루이즈의 동요하는 내면에 들어가기 위해, 팔리아이는 이미지와 관계 맺는 방식에 있어 두 가지 흥미롭고 이질적인 시도를 보여 준다. 먼저 영화의 중반부에 삽입되는 핸드헬드로 촬영된 영상은 뒤라스가 탐구한 ‘마스터 이미지image passe-partout’처럼 작동한다. 만능열쇠, 그리고 액자 속 그림과 유리 사이에 끼우는 매트 보드를 동시에 의미하는 프랑스 단어를 결합해 만든 이 개념을 뒤라스는 오직 텍스트에 의해서만 생명을 부여받는 중립적인 ‘표면’이자 ‘통로’로 이해했다. 루이즈의 시점으로 벽과 천장, 시계, 소파, 그림, 책 더미 등을 두서없이 훑는 저해상도 영상은 루이즈의 목소리가 그 위를 통과할 때 비로소 의미를 생산한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 루이즈가 자신의 악몽 같은 경험을 덤덤하게 이야기할 때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르게 보이는, 인물의 얼굴이 섬뜩하게 왜곡된 이미지들은 재현할 수 없는 여성의 트라우마를 감각적인 충격으로 가시화한다. 흔들리는 핸드헬드 영상이 카메라를 든 인간의 존재를 환기한다면, AI가 생성한 듯한 이 기이한 이미지의 홍수는 주체의 균열, 박탈의 신호처럼 보인다.
루이즈는 잠에 들었다가, 자신의 노트를 주운 남자 토마와 숲에서 만난다. 한낮에도 숲 안은 울창한 나무와 풀들이 하늘을 가려 밝지 않다. 어느새 낮과 밤의 경계가 흐려진다. 루이즈와 토마는 숲속을 배회하다 함께 뛰어놀고 그 안에 누워서 자기도 하는데, 그 모습은 물가에서 이 두 사람을 지켜보는 개 두 마리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두 사람의 만남이 실제인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다. 〈판타지〉의 숲은 확실성과 균질성을 거부하는 자아의 새로운 공간이니까. 부서지기 쉽고 찰나적일지라도, 꿈과 무의식으로 빚은 또 다른 심리적 현실이 그 안에 있(었)으니까. 달빛 아래 시냇물에 반쯤 잠겨 있는 루이즈의 이미지는 오필리아를 떠올리게 하지만(우리는 이미 한 차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루이즈의 모습을 봤다), 루이즈는 오필리아처럼 익사하지 않는다. 침잠하지도, 부상하지도 않고, 반은 물에, 반은 뭍에 머문다. 꿈과 현실의 경계, 잠과 각성의 경계,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