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Bhiksuni 감독 임권택 IM Kwon-taek | Korea | 1984 | 65min | Fiction and Documentary | 故 송길한 작가 추모 상영 Celebrating the Legacy of Song Gil-han © 임권택영화박물관 제공
2024년 12월 22일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가 생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 전주국제영화제가 기획한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 회고전을 준비하던 2017년 겨울, 송길한의 평창동 집 근처 막걸리 주점에서 〈비구니〉를 화제로 삼아 대화를 나누다가 한 이야기이다. “쓰레기 같은 세상은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돌아가지 않아.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배신하는 거야.” 어떤 맥락에서 이런 말이 나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치밀하게 주장된 거짓에 맞서고, 소외된 정체성의 무게를 직시한 이 작가에게 어울리는 일갈이었다. 그에 관한 단행본과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나는 송길한이 쓴 많은 계시적인 각본에 이와 같은 시각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완성 영화 〈비구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꼼꼼하게 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작가의 세계관을 응집한 작품이었다. 분량의 20% 정도를 촬영하고 불교계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혀 좌초된 이 영화에서 송길한은 한 출가 여승의 인생유전 스토리에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투사한다. 인간의 삶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 또는 역사의 격랑을 통과하는 인간의 삶을 기리는 〈비구니〉는 파손된 유적처럼 조각난 대여섯 개의 장면을 빌미로 전체를 추정해야 하는 형태로만 남아 있다. 사운드가 유실된 생필름을 전주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이 복원하여 무성영화 형식으로 제작한 영화에 따르면, 〈비구니〉는 탈속의 제스처 안에서 구제의 길을 찾는 수행자의 궤도를 추적하는 송길한 세계의 본류를 담고 있다. 39분 길이의 영화는 김지미가 분한 주인공 수연이 속세에서의 인연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사찰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행자 생활을 하는 시퀀스를 필두로 하여 비구니가 된 수연이 자신의 고향을 찾아가 가족 무덤 앞에서 제사를 올리는 신, 한국전쟁 때 버려진 고아들을 건사하며 피난을 떠나는 신, 사라지지 않는 욕망을 다스리기 위한 고투의 과정 등을 묘사한다. 집착을 버리려는 수연의 불안과 번민, 혼란한 세상의 한복판에 던져진 존재의 비의, 그리고 개인과 역사의 상호 작용이 날카로운 정밀성을 가지고 어우러진 모습이다.
〈비구니〉는 1980년대 예술적 각성의 길을 개척하던 임권택 감독의 날 선 작가 의식과 송길한의 역량이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확인되는 송길한의 일관된 작가적 관심사는 개인과 역사가 만나는 상상의 장소이다. 종종 그의 영화가 종교적인 색채를 띠는 것은 육체적, 사회적, 도덕적 갈등의 해소에 대한 갈망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미완의 기획을 연장하고자 한 대체제가 〈길소뜸〉(1986)이었다. 〈비구니〉를 통해 펼쳐 내지 못했던 전언이 번안된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 영화에서 송길한은 노스탤지어를 상실한 여인의 정체성 찾기 여정을 장대한 스타일로 묘사했다. 〈비구니〉에서 품었던 뜻이 좌절된 직후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김지미가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을 연기한 점 등 여러모로 두 영화의 연관성은 작지 않다. 〈비구니〉의 비전 안에는 역사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지만, 단순히 묵직한 주제 의식만 앞세운 영화가 아니었다. 이 영화는 세속적인 구원의 사랑과 연대에 대한 비전을 보여 준다. 송길한은 오랜 시간 동안 불길한 세상에서 꿋꿋이 자신을 단련하였고, 굴하지 않는 인간성을 지녔으며, 종래에는 초월적인 각성에 도달하는 인간의 진화를 담아내려 했다.
〈비구니〉가 기획된 1980년대 초반은 한국 영화계에 있어 주목할 만한 시대였다. 한편으로는 배창호와 이장호의 흥행 영화들이 맹위를 떨치며 대중영화에 대한 자각이 일었고, 임권택으로 대표되는 작가 의식의 각성이 다른 한 편에 있었다. 뭉뚱그려 ‘코리안 뉴웨이브’라고 불린 새로운 조류의 핵심은 국가 정체성에 대한 정의에 있다. 한국인은 누구이고 어디로부터 왔는가, 한국인의 의식과 철학은 무엇인가, 그리고 한국영화의 에센스는 무엇인가? 따위의 질문이 당대 한국영화의 중심 의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인간을 바라보는 송길한의 관점을 보여 주는 핵심어이다. 〈비구니〉에서 미처 다 드러나지 못한 송길한의 개성은 전작 〈만다라〉(1981)와 〈길소뜸〉, 〈티켓〉(1986), 〈씨받이〉(1987), 〈명자 아끼꼬 쏘냐〉(1992) 등 그가 쓴 많은 여로형 스토리에 녹아 있다. 그가 지어낸 이야기가 특별한 것은 이동하는 감각을 통한 내러티브 형상화에 있다. 드문드문 건너뛰는 삽화형 서사를 즐겨 쓴 송길한은 내셔널 시네마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조사와 탐문의 서사를 〈비구니〉에서 활용한다. 짧은 필름 안에 다수의 인상적인 장면들이 남는다. 삭발 의식에 대한 다큐멘터리적인 세밀함을 수록한 롱테이크, 속세에 대한 미련을 떨쳐 내듯 비구니가 된 수연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여 주는 클로즈업, 그리고 삭풍한설의 험로(險路)를 통과하는 수연을 보여 주는 롱숏 등은 연출 임권택‐촬영 정일성과 함께 이루어 낸 시각적인 승리이다. 그 감정적 힘과 미묘함을 가지고 송길한은 개인의 구도라는 단계를 넘어 한국사에 착종된 복잡한 정체성의 의미에 다가가려 했다.
복원판 〈비구니〉에 담긴 의미는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의 회고전에 즈음하여 한 인터뷰에서 송길한 자신이 완벽하게 요약했다. “토막 나서 부서진 영화를 관객들 나름대로의 이미지로 완성해 보면 어떨까.” 여기서 송길한의 성취는 한국이 안전과 번영을 누리는 국가로 발전하는 시기 그 반대의 것, 즉 억압, 대결, 착취, 폭력에 감싸여 있었다는 것을 간파했다는 데에 있다. 더 많은 이야기를 상상해야 하는 〈비구니〉는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면서 ‘스토리’보다 ‘시’에 가까운 이미지들을 연상하도록 한다. 송길한의 당대 작품들처럼 이 영화는 구도적 삶을 탐구하며 인간의 고뇌에 서린 다면적인 원인을 추적한다. 송길한‐임권택의 협력 관계를 중심으로 보자면, 〈만다라〉에서 확립된 주제와 도식을 반영하여 〈길소뜸〉과 〈티켓〉으로 잇는 가교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열정적이고 고통스러운 여정을 지나는 이들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김지미가 연기하였고, 폭력과 무력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자기 정화에 도달하는 인간, 특별히 여성의 삶을 조망한다. 그들이 지나야 했던 억압과 모욕을 이 영화도 감수했지만, 고통의 순환을 플로팅한 원형적인 스토리로 인간의 정신과 정체성을 파고든 송길한의 가장 빛나는 업적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