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 좀 들어줘 Hard Truths 감독 마이크 리 Mike LEIGH | United Kingdom | 2024 | 97min | Fiction | 마스터즈 Masters
“난 너무 지쳤어. 다 그만두고 싶어.” 마이크 리의 신작 〈내 말 좀 들어줘〉의 주인공 팬지는 모종의 갈등이 실체를 드러내고 이야기의 국면이 전환을 맞이하는 듯한 순간 울적한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갈등의 원만한 해소나 문제 상황의 극적인 해결 같은 건 여기 없다. 격렬한 분노와 극도의 불안으로 시종일관 몸을 떠는 이 중년의 여성은 그에게 소란을 안기는 세계에서 벗어나 그저 침묵 속으로 숨어들고 싶어 할 뿐이다. 하지만 잠을 청한다 해도 평온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는 낮에도 종종 침대에 몸을 욱여넣지만 늘 비명과 함께 깨어난다. 깨어 있는 세계와 잠든 세계, 그 어디에도 팬지가 편안히 속할 곳은 없다. 팬지는 온 세상이 그를 괴롭힌다고 여긴다. 이토록 극심한 괴로움 속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걸핏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비아냥거리기를 서슴지 않는 팬지는 마이크 리의 전작 〈해피 고 럭키 Happy-Go-Lucky〉(2008)의 한없이 낙천적인 주인공 포피와 정반대 편에 있는 듯한 인물이다. 팬지가 포피를 봤다면 기어이 한마디했을 것이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 세상이 재밌어?” 하지만 세상을 감당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찾았다는 측면에서 둘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 인물을 끈질기게 들여다보는 시선을 통해 가족과 사회의 초상을 그려 내곤 했던 마이크 리의 방식은 데뷔한 지 50년이 넘어 연출한 〈내 말 좀 들어줘〉에서도 유효하다. 그런데 여기 웃음기는 거의 없다. 가구 매장 점원, 마트 손님, 병원 의사에게 분노를 표출하다 못해 인신공격까지 일삼는 팬지를 보고 있자면 어느 순간 미소조차 사라진다.
팬지는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을까? 심적 고통은 물론 두통, 치통, 근육통 등 각종 신체적 통증을 호소하는 그를 보며 병리학적 진단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정작 영화는 그 근원을 세세히 파헤치고 분석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는 팬지의 남편과 자기만의 고독에 빠져 하염없이 거리를 걷는 그들의 아들,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은 가족의 집을 통해 질식할 듯 폐쇄적인 일상의 순환을 보여 줄 뿐이다. 구성원을 옥죄는 게 집이라는 유무형의 구조인 걸까? 혹은 그들이 집을 그토록 숨막히는 곳으로 만들었을까? 원인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마이크 리는 도통 답을 찾기 어려운 그 꼬리잡기의 풍경 속에 관객을 던져 놓는다. 우리는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아픔으로 뒤덮인 나날을 숨죽이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따스하고 활기찬 기운을 불어넣는 건 팬지의 동생 샨텔이다. 두 딸과 함께 지내며 살롱의 미용사로 일하는 그는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정하게 반응하며 푸르른 식물과 더불어 산다. 물론 팬지에게는 샨텔의 행복 역시도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요소다. 5월 어머니의 날을 맞아 자매는 5년 전 세상을 떠난 엄마의 무덤을 찾고, 샨텔은 팬지의 가족을 집에 초대해 식사 자리를 마련한다. “언니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랑해.” 대화의 물꼬를 열고 싶은 샨텔의 노력은 기이한 해방의 순간을 만들지만, 모종의 가능성은 반듯한 팬지의 집 안에 다시금 가둬진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마지막 장면을 지켜보게 만드는 영화는 일방적이지 않은 상호 교통의 어려움과 더불어 누군가를 고립으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는 소통의 희망 역시 생각하도록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