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소여헨 SO Yo-Hen | Taiwan | 2024 | 101min | Documentary | 월드시네마 World Cinema


두 남자가 공원에 앉아 있다. 마주 앉은 그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듣자 하니 고향을 떠나 타국으로 떠나온 이들인 듯하다. 별것 없어 보이는 대화 중에 무언가 이상한 말이 끼어든다. 이쪽에서 그들을 찍고 있는 카메라에 대한 말이다. 언뜻 이쪽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다. 카메라를 의식하고 있는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쓴 시를 읽어 보려고 한다. 그들처럼 인도네시아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 시다. 하늘은 점차 어두워지고 곧 가로등이 켜진다. 간단한 말과 제스처로 영화의 경계는 흐려지고, 어스름한 시각은 기묘한 분위기를 만든다. 각자가 쓴 시를 읽는 두 사람은 시인이자 학생이며, 그들이 읊는 시 속의 인물들처럼 타지에서 살기 위해 애쓰는 이주자들이기도 하다. 대상과 주체의 경계마저 흐려지는 이 흥미로운 도입부를 지나, 영화는 환상과도 같은 밤의 세계로 관객을 데려간다.

대만에서 태어난 감독 소여헨은 〈오두막 Gubuk〉(2019), 〈여공들의 기숙사 Dorm〉(2021)처럼 줄곧 이주자들에 관한 작품을 만들어 왔다. 그가 〈공원〉의 배경으로 삼은 대만의 타이난 공원은 이주 노동자들이 주로 오가는 일상적 공간이다. 그동안 여기에는 무수히 많은 이들의 경험과 이야기가 쌓였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 가족을 위해 타지에서 힘든 노동을 감내했을 시간들,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유년 시절의 기억들, 새로운 터전에서 겪은 새로운 일들, 아마도 사랑과 피로의 날들. 귀 기울여 듣고 싶지만 이미 저 멀리로 흩어져 버렸을 그 이야기들에 영화는, 또한 카메라는 어떻게 접속할 수 있을까? 공원을 지나는 이들을 멈춰 세우고 인터뷰를 하거나, 수집한 이야기를 들고 극의 형태로 재현하는 방법을 쉽게 떠올려 볼 수 있을 테지만 〈공원〉의 방식은 그와는 다르다.

노트를 들고 밤의 공원 구석구석을 거니는 두 남자 아스리와 하산. 그들이 애초 어떤 약속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밤마다 공원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묻는 말을 통해 이 동행의 조건은 충분히 유추된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시로 번역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대만에서 공장 노동자, 돌봄 노동자 등으로 일하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온갖 이야기. 시가 된 그 이야기들은 두 사람의 상상 속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의 한 꼭지가 되어 공원에 울려 퍼진다. 단지 상상만인 건 아니다. 비어 있는 경비실과 돌 모양의 스피커를 활 용한다면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경비실을 라디오 부스 삼아 이야기를 이어 가는 그들에게 다가간 카메라는 그 상상을 마치 현실처럼 만들어 주는 장치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현실의 질료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생기를 얻는다. 노동으로 뒤덮일 낮이 오기 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의 시간을 수놓는 노동자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밤의 시간을 구성하는 영화적 요소가 되어 활동을 시작한다. 두 남자가 열어 둔 말의 활로는 곧 이야기의 주인공을 직접 화자의 자리에 초대하는 경로로 이어진다. 한편 페이스북에서 이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을 보았다며 영화 제작의 뒤편을 알려주고, 이제는 좀 지친다는 아스리는 예술의 쓸모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말을 던진다. 현실을 어떤 방식으로 소묘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영화는 그 쓸모와 역할에 관한 질문을 밤의 풍경 속에 슬며시 적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