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니치’ 3세 신숙옥. 도쿄 시부야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젊은 나이에 인재 컨설턴트 회사를 설립해 사업가로서 승승장구하다가 시민 활동을 시작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당차고 유쾌하며 할 말은 해야만 하는 카리스마 있는 여성. 〈호루몽〉의 주인공을 소개하자면 조금은 숨이 차다. 그가 걸어온 길, 겪어낸 사건, 눈길을 붙드는 성격과 인품은 그 자체로도 영화를 가득 채운다. 호탕하고도 진지한 모습은 그의 작은 말 한마디에도 집중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카메라와 함께 그의 행보를 따르다 보면 재일조선인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일본 사회의 현재와 그 역사가 눈에 들어온다. 더불어 자신의 정체성과 씨름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싸우고, 갈등하고, 연대하면서 살아온 여러 세대 여성의 이야기도 귓가에 들린다.
〈호루몽〉은 신숙옥이 2018년 DHC 텔레비전 측에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의 추이를 느슨한 주축으로 삼아 이야기를 펼쳐낸다. 이 재판의 내용은 영화의 굵직한 줄기를 만들며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는데, DHC에서 제작한 ‘뉴스여자’라는 우익 성향의 프로그램에서 오키나와 평화운동을 공격하며 그에 연대하는 신숙옥의 출신을 이용하고, 유언비어를 확대 재생산한 일이 시발점이 됐다. 신숙옥은 이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선동을 지적하며 이를 제노사이드로 지목한다. 일본 사회를 뒤덮은 무시무시한 혐오의 물결에 불을 지피는 격이니 말이다. 진실한 사과와 프로그램의 삭제를 요청하는 소송은 해를 거듭하며 “지금 일본의 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는 신숙옥의 바람처럼 오늘날 일본 사회에 긴급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과정을 따라가는 영화에는 한 개인의 삶과 자이니치의 역사가 쌓인다.
어떻게든 행복해지고 싶어 이를 악물고 돈을 벌었던 젊은 시절, 여성이자 마이너리티인 신숙옥에게 세상은 당연히 단단한 벽이었다. 남들보다 네 배 정도 더 노력해야 그나마 평균적인 삶에 다가갈까. 그런 상황에서도 시대의 흐름을 읽으며 사업의 성공을 이끌었던 그는 정치인의 혐오 발언을 계기로 시민운동에 뛰어든다. 이는 단지 정의로운 결단만이 아니다. 돈을 벌고 따뜻한 집에 살아도 행복하지 않았다는 회고는 “살기 위해서는 싸워야 하고, 살아 있기에 싸우는 것”이라는 말과 겹치며 그의 삶이 차별과의 싸움과 어떻게 닿아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결단은 방탄조끼를 입고 살아야 할 정도로 일상적 위협에 직면하게 했지만, 연대가 필요한 곳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동료들과 따뜻한 우정을 나누는 신숙옥의 모습은 행복한 삶과 무척이나 가까이 있는 듯 보인다.
영화는 한편으로 관동대지진의 역사에 접속하며 재일조선인이 겪은 차별과 혐오의 세월을 보여 준다. 여기에는 신숙옥의 어머니이자 자이니치 2세인 케이코의 이야기도 있다. 괴롭힘당하는 게 싫어 출신을 감추던 어린 시절,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결혼과 함께 날아가 버린 꿈, 그리고 그 모든 과거와 마주하며 드디어 나 자신으로 살게 된 지금의 모습.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두 발로 땅을 딛고 나로서 서는 일이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영화는 그 또한 분명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처럼 세대를 넘어 번져 가는 시선은 오키나와 평화운동처럼 폭력에 저항하는 움직임으로도 확장된다. 〈카운터스〉(2018), 〈모어〉(2022) 등 인물의 강렬한 에너지에 꼭 맞는 형식을 구축해 온 이일하 감독은 이번에도 잊을 수 없는 주인공을 우리에게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