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 거야. 언제까지일지 나도 모르지. 내가 무엇이 될지 무슨 상관이야. 나는 그냥 살고 싶어.

… 나는 늘 내일을 바라. 또 다른 즐거움이 될 거라 믿거든.

… 인생은 항상 호기심이지.

…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찾고, 새롭게 하고, 탈출하거나 반복해.”

‘나는 살고 싶어(Quero É Viver)’ / 노래: 우마노스(Humanos, 인간들)

프롤로그

포르투갈 여성 감독 히타 아제베두 고메스는 2007년 의사로부터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진단을 받고 평생 꿈꿔오던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병원을 나오자마자 그리스행 비행기 티켓을 산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나 70대에 들어선 고메스 감독은 다시 그리스로 향한다. 이번에는 카메라를 들고, 일행들과 함께.

이 영화는 이름 모를 관광객이 찍은 파로스섬 공연 영상으로 어둠을 열며 마치 그리스 비극의 ‘프롤로그’처럼 시작된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지역 음악에 맞춰 서로의 어깨에 팔을 건 채 춤을 춘다. 이 짧은 서두는 고메스 감독이 삶에 건네는 인사이자 우리가 비극이라고 보는 인생이 어쩌면 어둠 속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며 함께하는, 소박하지만 따뜻한 축제라는 것을 깨달은 이가 관객에게 전하고픈 삶의 비밀에 대한 단서이다. 

 

‘낭독’으로서의 영화

에게해에 위치한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건 아마 산토리니섬일 것이다. 그리스를 상상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인 흰 벽에 파란 지붕을 인 집이 가득한 곳이다. 고메스 감독 일행은 같은 제도 내에 있어 환경은 비슷하지만 관광객의 발걸음으로부터는 조금쯤 떨어진 주변 섬으로 향한다. 여행은 소설의 한 장면처럼 배 위에서 나누는 대화로 시작되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두 명의 그리스 시인, 요르고스 세페리스와 오디세아스 엘리티스를 언급하며 영화의 방향성을 드러낸다. 그렇다. 이 영화는 여행에 대한 영화이자 영화로 쓰는 ‘지적인 여행기’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유튜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어디에서 먹고, 자고, 어떤 액티비티가 있는지를 알려주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관광기’의 정반대 편에서 어떤 여행이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고메스는 그리스 문학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신화로부터 먼 곳에서, 심지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도 언급하지 않은 채 문학적이고 문화적인 호기심을 갖고 그리스에 대한 더 깊이 있는 탐구로 나아간다. 영화는 줄곧 그리스에 대한 시, 소설 등의 글과 그리스 작가들이 쓴 작품을 “읽어준다”. 때문에 관객은 그리스 섬의 고요함과 아름다운 자연, 관광지라는 피할 수 없는 이미지 사이를 오가며 조아오 미겔 페르난데스 호르헤의 『포르투갈 여인』과 알베르 카뮈의 『여름– 추방된 헬레네』, 콘스탄디노스 페르투 카바피스의 시 ‘양초’,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그리스 항아리에 대한 송가’ 등을 듣게 된다.

1994년 미국에 간 최승자 시인은 그곳에서 작가들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글을 읽는 ‘리딩’ 문화를 접하고 이상하고도 참신한 행위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방식은 고메스의 영화에서도 재현된다. ‘리딩’은 책은 혼자서 묵독하며 그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에 반하는 행위인 동시에, 문학은 독자와 ‘나누는’ 것이라는 정신을 나타내는 전복적인 읽기 행위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읽어주는 문학 구절들을 듣는 사람은 바로 관객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고메스 감독과 여행을 하기도 하지만 종종 글을 읽고 카메라를 쳐다보며 관객이 이 ‘리딩’ 문화에 잘 따라오고 있는지, 혹은 잘 공명하고 있는지 확인하기도 한다.

〈퍽 더 폴리스〉의 특이한 ‘리딩’ 형식의 보이스오버는 또 한 편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화물차 Le Camion〉(1977)에서 실험적인 방식을 도입해 “이것은 영화다.”라고 명명한 바 있다. 영화는 길 위를 오가는 화물차들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테이블 앞에 마주앉은 두 사람이 뒤라스가 만들고 싶어 한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는 것으로 구성돼 있다. 시나리오 자체만으로는 영화가 될 수 없지만 시나리오를 읽고 최소한의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서 관객의 상상이라는 참여 방식으로 영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퍽 더 폴리스〉와 〈화물차〉가 제시하는 이른바 ‘리딩 영화’1는 ‘이것은 영화인가? 이것은 전위적인 행위인가?’ 라는 질문을 끌어낸다. 동시에 관객의 참여로 영화를 완성시킨다는 전제는 두 편의 로드무비가 결론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이 여행을 함께하자’는 제안에 있음을 드러낸다. 물론 70년대에는 질문이자 선언이었던 것이 2025년에 이르러서는 현대영화의 경향성으로 굳어져 가고 있는 듯도 하다. 글과 이미지의 부정확성, 불일치성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고, 디지털과 필름을 교차해 생기는 이질감이 만들어내는 생경함과 노스탤지어 또한 모던 영화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으며, 후반작업에서 이루어지는 디지털의 기능 변화도 이를 효과적으로 돕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제한된 자원 속에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에게 한 가지 해법이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중요한 건 호기심

미술 공부를 중단하고 영화로 선회한 고메스는 마누엘 올리베이라 감독의 영화 〈좌절된 사랑 Amor de perdição〉(1979)을 보고 그의 제작팀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부탁했고, 차기작 〈프란시스카 Francisca〉(1981)에서 의상 조수로 참여하며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현장에서 일하며 만든 첫 장편 〈요동치는 대지 소리 The Sound of the Earth Shaking〉(1990)로 데뷔한 고메스는 초기에는 현대적으로 표현된 시대극 작업을 많이 했다. 그는 내러티브가 중심이 되는, ‘미술 작품’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만큼 아름다움의 극치를 드러내는 미장센을 자랑하는 것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2016년을 기점으로 영화 스타일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서신 교환〉(2016)부터 그는 시적인 에세이 영화, 더 개인적이고 문학적이며 연극적인 형식에 사로잡힌 듯한 형식적 새로움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2019년 잡지 〈노트북〉과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그 변화의 계기가 된 생각을 유추해볼 수 있다.

 

“어디로부터 시작됐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무언가를 다시 주워서 엉망으로 만들고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어요. 시간을 통과하면서 우린 계속 이런 식으로 작업해 왔고 그리스 이후로는 크게 변한 건 없어요.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건 새롭게 보이거나 혹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꼭 의도적으로 그런 게 아니라도 말입니다.”
– 2019년 8월 〈노트북〉, 저자 호르헤 모우린

 

이 변화의 계기에 2007년 고메스가 의사로부터 들은 진단이 영향을 끼쳤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고메스는 진단을 받은 후 그리스를 여행했고, 20여 년을 더 살았고, 영화의 형식적 실험을 시작해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등을 재료로 수많은 걸작들을 만들어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의심할 여지없이 미국의 전설적인 갱스터 힙합 그룹 N.W.A의 ‘FUCK THE POLICE’를 변형한 것이다. 폴리스(POLICE)와 같은 발음을 가진, 그리스 문명의 핵심 요소라 할 만한 자치 도시국가를 뜻하는 폴리스(POLIS)를 대체해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권위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나 정치 혹은 의학적 판단이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

이 여행기 영화에도 중요한 분기점이 있다. 여행단이 단체로 차를 타고 이동하며 노래 ‘나는 살고 싶어’를 듣는 장면이다. 초·중반까지 그리스에 관한 문학에 몰두하던 영화는 이를 기점으로 음악에 대한 영화로 변모한다. 또 그 음악은 파도 소리라는 자연의 소리로 변화해 결국 남는 것은 제작진과 관객이 함께 보낸 아름다운 시간에 대한 인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1. reading film.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명칭으로 필지가 임의로 명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