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영화를 위한 노트 Notes for a Film
감독 이그나시오 아구에로 | Chile, France | 2022 | 103min | 마스터즈
라울 루이즈, 호세 루이스 토레스 레이바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한 바 있는 칠레의 영화감독 이그나시오 아구에로는 신작 〈한 편의 영화를 위한 노트〉에서 극중의 내레이터로 출연한다. 1889년 칠레 발마세다 정부의 요청을 받고 벨기에에서 칠레로 건너온 토목 기술자 구스타브 베르니오리의 회고록 『아라우니카에서의 10년 1889 1898』을 느슨하게 각색한 이 영화는 외부인의 눈으로 본 칠레 역사의 한 시기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어지럽게 섞이는 하이브리드 서사는 칠레가 아라우니카의 평화라는 명분을 앞세워 마푸체족의 땅을 강제로 점령한 지 몇 년 후를 배경으로 한다. 빅토리아에서 테무코로 이어지는 철도를 놓기 위해 고용된 엔지니어였던 베르니오리는 원시적인 자연 환경을 개조하고 건설하려는 사회, 그곳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 마푸체족과 대면한다. 개발과 건설의 임무를 수행하는 젊은 개척자는 토착 원주민으로부터 말과 글을 배우고 정서적 교감을 나누며 저들의 영웅적이고 비극적인 사연에 가까이 간다.
화면이 열리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 위에 한 척의 배가 떠 있다. 화면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1889년 3월 칠레 남부 앙골의 기차역이 있었던 곳에 아구에로 감독이 서 있다. 카메라 쪽으로 몸을 돌린 아구에로는 구스타브 베르니오리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금은 기차도 역도, 레일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감독의 진술은 쇠락한 공간의 을씨년스러움을 가중하는데, 이어서 프레임 왼쪽에서 베르니오리로 분장한 배우 알렉시스 메스프뢰브가 나타난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아구에로의 앞쪽에 자리를 잡고 카메라를 향해 가족들과의 이별에 대해 말한다.
돌아갈 기약에 대한 우려로 마음이 무거웠던 브뤼셀에서의 마지막 포옹에 대한 회고에 이어 아구에로의 해설이 덧붙여진다. 앙골의 인근 도시 콜리폴리에 묵게 된 베르니오리는 호텔 창밖을 내다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콜리폴리에서 처음으로 인디언을 만났어요. 가여운 악마들. 맨발에 차말(마푸체족의 전통 의상),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사람들. 솔직히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라우카니아의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이 자랑스럽고 호전적인 종족을 대체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을까요?” 아구에로는 메스프뢰브에게 종이 대본을 건네고 그가 19세기 말 칠레 공화국의 상황을 해설하는 대사를 읊는 동안 카메라는 360도로 회전하면서 이 황폐한 공간의 현재를 보여준다.
베르니오리의 여행 일기를 영감으로 삼았지만 아구에로 감독의 접근은 현대 다큐멘터리의 확장된 양식들을 도입하여 흥미로운 방향으로 흘러간다. 〈한 편의 영화를 위한 노트〉는 외지인의 영토 지배에 대한 반(反) 식민주의적 시각에 기초하여 베르니오리가 오래된 유적지를 방문하고 현재 칠레에서 모험을 재연하는 장면, 아구에로 감독이 등장하여 당시 스토리에 주석을 달거나 배우에게 연기 지도를 하는 장면들을 한 프레임 안에 태연하게 담는다. 현대의 감독과 배우는 식민 지배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는 원주민 공동체를 방문하고 개량과 건설을 명분으로 수많은 마푸체족이 죽거나 쫓겨난 잔혹한 과거를 회상한다. 여전히 남아 있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느끼는 분노와 원한을 자세히 설명하는 장면들은 일견 두서없어 보이는 이 이야기의 본류라고 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 사실과 허구, 기록과 재현, 흑백과 컬러의 공존을 통해 실존 인물의 행적에 대한 재구성, 사료의 아카이빙, 역사 에세이, 자기반영적 논평 등이 혼합된다. “지금도 타자와 그들의 영토에 대한 지배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고 말하는 아구에로 감독은 주인공 메스프뢰부가 마푸체족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의 폭력적인 만남에 대해 회상하는 내내 이런 스타일을 유지한다. 특별히 그가 마푸체족 사내에게 1부터 10까지의 숫자를 부족 언어로 학습하는 장면은 서유럽에서 온 백인 남성이 가장 먼 곳에 있는 이민족과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유머러스한 진술이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땅을 위해 저들이 한 일은 가치가 있었을까? 〈한 편의 영화를 위한 노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한 탐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