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뮤지컬, 퀴어 로맨스, 사회 풍자적 코미디까지. 주앙 페드로 호드리게스는 68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장편 안에, 거침없는 상상력과 빠른 호흡으로, 이 모든 걸 화끈하게 담아냈다. 2069년, 죽음을 앞둔 초로의 알프레도에서 시작한 영화는,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소년 알프레도와 그로부터 몇 년 동안의 청년 알프레도의 꿈과 사랑, 욕망에 관해 말한 뒤, 다시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른바 ‘로열패밀리’라 불리는 가문의 왕자 알프레도는 집안의 오랜 자랑인 소나무 숲이 대형 화재로 한순간에 모두 타버리는 일을 계기로 소방관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가족들 앞에서 선언해버린다. 얼핏 자연재해처럼 보이는 화재가 실은 지구 온난화가 부른 인재라는 점에서 더없는 참극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미 전 세계가 파괴와 붕괴 일로로 빠르게 추락하고 있음을 체감하고 직감한 알프레도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일말의 책무를 느낀다.

 

알프레도를 움직이는 그의 다급함과 갈급함의 원인이 단지 외부 세계의 변화에만 있는 건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나고 자란 이 집안, 그 기원과 역사와 크게 맞닿아 있다. 겉으로는 ‘고귀한’ 가문을 운운하지만, 실은 식민 지배로 얻었을 계급적 우위를 내세워가며 인종 차별주의적 발언을 거리낌 없이 내뱉고, 혐오의 정서를 짙게 드리우고 있는 이곳, 타인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면서도 그런 시선 따위는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들의 세계 한가운데서 일종의 각성을 거친 알프레도는 집을 떠나면서 비로소 자기를 찾는 여정에 오른 것이다. 그가 도착한 곳은 꿈과 환상, 욕망이 투사된 소방대원들의 세계로 그곳에서 그는 교관 알폰소를 만나 뜨겁고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알프레도의 또 한 번의 전환적 각성인 셈이다.

 

‘지금의 포르투갈은 공화국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누군가에게는 한참 전 과거 왕실이 여전히 그럴듯한 환상이 돼주는가. ‘로열패밀리’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비치길 원하는가.’ 영화를 기획하던 당시 주앙 페드로 호드리게스의 질문이다. 그는 지난 시대의 허상을 붙잡은 채 과거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고 싶어 하지 않은 이들의 지독한 허위의식과 안일함, 고리타분함과 고정관념, 무책임, 그것을 향한 비판적 문제의식과 그 전복을 시도하려는 영화적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동시대적 상황을 영화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고 온다.

 

이를테면 코로나 팬데믹으로 제약이 있는 상황 속에서 촬영했는데 그런 현실을 모른 척, 없는 척하는 영화는 가짜라는 생각에 코로나바이러스 전염과 그로 인한 죽음들을 영화 내용의 일부로 가져왔다. 또한 기후 위기라는 시의성 있는 논의 거리를 극 중 화재와 연결하고, 그레타 툰베리의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 연설문을 인용해 알프레도의 자기 선언문처럼 보이게 한 것도 대표적이다. 그는 영화 안과 밖, 과거와 현재를 과감하게 접속해나간다.

 

한편, 주앙 페드로 호드리게스의 또 다른 야심은 이 영화를 판타지성이 강한 러브 스토리로 만들되 그것을 그럴듯하게 설득해내는 데 있다. 소방관이 되고 싶은 백인 알프레도와 소방관인 흑인 알폰소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을 통해서는 격정의 에로티시즘뿐만 아니라 정체성을 둘러싼 교차성 정치의 역학까지도 읽어보게 만든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의 사랑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또 하나의 전복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이중의 통쾌함을 안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