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기차 안,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노란 노트를 펼쳐 그 안에 적힌 문장들을 소리 내 읽는다. 잠시 후 여자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기차 안보다 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녀는 낮고 구슬픈 목소리로 나는 아프다고, 당신은 내 언어를 앗아 갔다고 흥얼거린다. 그러다 돌연 노래가 끊기고, 다시 남자가 그녀의 노트를 읽기 시작한다. 우리는 루이즈를 만나기도 전에 페이지마다 빼곡히 적힌 그녀의 내밀한 욕망과 두려움을, 이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다. 루이즈는 주로 동굴처럼 어둡고 텅 빈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그 집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집의 내부 역시 온전히 보이지 않는다. 루이즈가 처음 그 집 밖으로 나올 때, 루이즈는 그림자로만 나타난다. 어쩌면 루이즈는 아직 세계 속에 온전히 존재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판타지〉의 도입부는 이 영화가 취하는 방식을 미리 압축해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