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Where Would You Like to Go?
감독 김희정 | Korea, Poland | 2023 | 104min | 폐막작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2017년에 출간된 김애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는 소설에서 많은 것을 취했으나,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공간을 더해 문학적 표현 너머 영화적 순간의 창조를 꾀한다.
이야기는 어떤 죽음에서 시작된다. 어느 평범한 오후, 명지(박하선)는 교사인 남편 도경(전석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체험 학습 도중 물에 빠진 반 학생 지용을 구하려다 함께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비극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명지는 한동안 폴란드에 와서 지내라는 사촌 언니의 연락을 받고 바르샤바로 떠난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의 시간도 특별할 것 없이 흘러간다. 그곳에서 공부 중인 옛 친구 현석을 만나서도 명지는 남편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명지의 상태는 옷을 들춰보기 전까지는 티가 나지 않는 피부 발진 같다. 남편을 잃은 상처는 속에서 계속해서 곪고 있다. 남겨진 사람은 또 있다. 지용의 누나 지은. 도경과 함께 세상을 뜬 지용은 누나 지은과 단 둘이 살아가던 소년이었다. 하나뿐인 동생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 지은은 병원에 입원하지만 재활의 의지를 놓아버린 상태다. 그런 지은을 챙기는 건 지용과 함께 스케이트보드를 타던 친구 해수다.
영화에는 명지가 스마트폰 인공지능 음성 인식 기능 서비스 ‘시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몇 번 등장한다. 명지가 슬프다고 하자 시리는 이렇게 답한다. “제가 이해하는 삶이란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 모든 것이랍니다.” 이 문장은 곧 이 영화를 설명하는 문장이 된다. 삶이 비극이기만 하다면 우리는 살아갈 동력을 잃을 것이다. 지극한 슬픔의 수렁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는 것은 따스한 한 조각의 빛처럼 문득 만나게 되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다. 영화는 그 순간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내색하거나 토로하지 않는 두 인물 명지와 지은의 성격처럼 영화는 내내 감정을 절제하지만 후반부에 (역시나 담담한 목소리로) 낭독되는 ‘편지’ 앞에서 관객은 카타르시스라 불러도 좋을 감정을 느끼며 뜨겁게 고양될 것이다. 지은은 명지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적는다. “동생이 마지막으로 움켜쥔 게 차가운 물이 아니라 권도경 선생의 손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놓인다”고. 편지를 읽은 명지는 그제야 남편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삶이 죽음에게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게 뛰어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영화 초반의 안치실 장면에서 카메라는 푸르죽죽한 권도경의 손을 잠시 비춘다. 이 숭고하고 따뜻한 손은 결국 지용을 거쳐, 지은과 명지의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손이 된다.
물에 빠져 생을 달리한 선생과 학생의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김애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 역시 사회적 참사 이후 상실과 애도에 대한 작가 의식이 담긴 책으로 받아들여졌다. 상실과 상실 이후의 삶은 김희정 감독의 영화 전반에 흐르는 테마이기도 하다. 〈프랑스여자〉, 〈설행_눈길을 걷다〉,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 〈열세살, 수아〉에서도 가까운 이의 죽음과 그 죽음이 남긴 흔적들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이 있었다. 상실 이후의 삶을 그리는 데 전작 〈프랑스여자〉가 혼란한 마음의 지도를 따라가기에 충실했다면,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조금 더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는 희망의 여정에 가까워 보인다. 소설의 에든버러는 영화에서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바뀌었는데, 8월 1일 바르샤바 봉기일에 길을 가던 시민들이 모두 멈춰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장면을 힘주어 영화에 담은 것에서도 애도와 추모, 기억에 대한 필요를 말하고 싶은 감독의 메시지가 읽힌다.
충분한 애도 뒤에야 뗄 수 있는 걸음, 원망이 아닌 이해 혹은 염려로 맺어지는 관계에 대한 김희정 감독의 따스한 시선이 담긴 영화다. 생의 빛과 그림자 속에서 외로이 헤매는 여성의 얼굴을 그려낸 박하선도 영화에 깊이 스며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