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는 또 하나의 우주다. 인간이 범접하기 힘든 거대한 바다나 한시도 쉬지 않고 흐르는 도도한 강과 달리, 호수에는 신비가 고여 있다. 다네 콤렌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애프터워터〉는 호수에 대한 상상력과 사색의 시간들을 필름에 옮겨 새긴다. 다네 콤렌 감독은 호수를 연구하는 생태학자 G. 에벌린 허친슨의 「호소학에 대한 논문」에서 영감을 받아 호수의 기이한 매력에 대한 영화를 완성했다. 그런 의미에서 〈애프터워터〉는 다네 콤렌이 이미지와 사운드를 도구 삼아 완성한 새로운 형식의 논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숫가에 머무는 시간‘들’

실험실 병 속에 든 샘플들의 클로즈업 화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이내 연구실과 도서관 풍경들을 차례로 선보인다. 곤충과 생선을 연구하는 요나시, 풀잎과 허브를 연구하는 싱네는 도서관과 정원에서 하루를 보낸다. 종일 연구를 이어가던 두 사람은 어느 날 기차를 타고 도시를 떠나 호숫가에 머문다. 두 사람은 호숫가에 친 텐트에서 책을 읽고 과일을 먹고 산책을 하고 숲을 거닐고 수영을 한다. 호숫가에는 평화롭고 목가적인 시간만 흐르는 게 아니다. 세찬 비바람이 불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따사로운 햇살을 허락하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생명이 움트기도 한다. 호숫가에 오래 머물수록 바깥세상의 속도는 점점 지워지고 고요한 시간이 고인다. 얼마 뒤 낯선 이가 찾아와 호숫가는 세 명의 트리오를 위한 장소가 된다.

 

이윽고 영화는 다른 장소, 다른 시간대에 머무는 다른 트리오들의 시간까지 포섭하며 확장된다. 〈애프터워터〉는 말보다 이미지, 이미지보다 사운드, 정확히는 호숫가에 머무는 시간‘들’로 채워진 영화다. 카메라는 ‘변화가 가능한 자연 생태계의 세계’인 호수의 다양한 풍경과 그 안에 녹아든 사람의 시간을 담아낸다. 시간을 담아내는 방식은 비교적 단순하다. 사건과 이야기 속에 시간을 가두지 않고 이미지와 사운드를 그릇 삼아 흘러가는 시간의 형태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것이다. 이때 인물들은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는 척도로 작용한다. 고요한 호숫가에는 몇 만 년의 시간이 흘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 시간이 흐른다는 걸 알 수 있는 유일한 지표는 바로 각기 다른 호숫가에 머무는 세 그룹의 트리오다. 인물들은 호숫가에서 걷고 숨 쉬고 잠자고 서로를 끌어 안는다. 부스러기 같은 그 시간들을 가만히 담아내는 카메라는 때로는 함께 사색하고 어쩔 땐 앞서 나가며 신비로운 이미지들을 고요하게 포착한다. 마침내 호숫가의 시간은 가만히 바라보는 관객에게마저 사색의 통로를 제공한다.

 

시간 감각의 물질화

특히 도드라지는 건 시간이라는 ‘감각’을 물질화하는 촬영과 음향이다. 자연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인 영상은 종종 몽환적인 화면으로 전환되고 관객의 시간 감각마저 앗아간다. 자연의 소리 위에 불쑥 들어오는 전자음도 이 영화의 비현실적인 매력을 한층 배가한다. 클로즈업과 롱숏, 현미경과 망원경을 오가는 편집은 영화를 익숙한 서사와 형식에 얽매지 않고 마치 물처럼 유동적인 무언가로 변모해간다. 사람들의 삶 곁에서 친숙하게 생명의 기운을 내뿜었다가도 종종 안개에 둘러싸여 모습을 감추는 호수는 마치 작은 생태계를 축소한, 또 하나의 우주와도 같다. 그리하여 고요하게 쌓인 호수의 시간 속에는 함께 사람들의 기억도 층층이 퇴적되어 마침내 (영화라는) 신비로 감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