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빛 Winter Light 감독 조현서 CHO Hyun-suh | Korea | 2024 | 89min | Fiction | 한국경쟁 Korean Competition
고등학생 다빈(성유빈)의 삶은 고단하다. 동생 은서는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데, 설상가상 다빈은 은서의 등하교를 책임져야 한다. 아버지가 부재한 집에서 형은 탈출했고, 목사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엄마는 위태로워 보인다. 여자 친구와는 사이가 좋지만 형편 차이가 커 방학 기간에 있을 해외 교류 프로그램에 함께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더욱이 오랜 친구 사이인 정원은 가정폭력에 지쳐 가출을 계획 중이다. 다빈의 삶에 한 줌 빛이 비추기를. 그리하여 그가 소년 특유의 웃음을 되찾을 수 있길 바라본다.
영화 속 다빈은 고민이 많다. 복잡한 가정사 덕분에 공부에만 전념하는 친구들과 달리 시간적·경제적인 여유도 한참 부족하다. 〈겨울의 빛〉의 이야기는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이야기를 쓰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와 나눈 대화였다. 경찰이 된 친구는 여성청소년과에서 근무 중이었다. 그는 청소년들을 지도하며 생긴 무력감에 지쳐 있었고, 그것은 본인 안에 있는 정의감과 제도적 한계의 충돌 때문이었다. 물론 경찰이 할 수 있는 일과 사회복지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르지만, 그는 직업 정신보다는 어른으로서 가지는 안타까움을 크게 느꼈던 것 같다. 또 다른 계기는 오래전 사건이지만, 임대 아파트 주민들의 초등학교 편입을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의 시위였다. 물론 그 안에 각자의 사정과 이유 들이 있겠지만 같은 지역민으로서 불편한 마음이 컸다. 너무 올드해서 당연하게까지 느껴지는 계급과 불평등, 그것들의 대표적인 예처럼 보였던 그 사건이 언론에서 보도되자 새삼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임대 아파트 주민에 대한 거부감 역시 오래된 감정이고, 대다수의 신도시에서 비슷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 같다. 나의 중·고등학생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런 분위기와 감정이 항상 깔려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사건이 나에게 불편함을 안긴 것은 거부의 대상이 초등학생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저렇게 어린 애들한테도 야박하게 구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다 문득 저런 일을 겪은 아이들, 각 가정 상황을 떠나서 저러한 나눔을 사춘기 이전부터 교육받은 이 학교의 아이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며 서로를 바라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낳았고, 그것들이 합쳐져 내가 느꼈던 도시의 정서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살아가는 내 친구의 무력함을 몸소 느끼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고자 했다.
가정 환경에서, 학교 생활에서도 고달픈 지점이 많지만 다빈은 자신의 감정을 쉬이 터트리지 않는다. 〈살아남은 아이〉(2018), 〈윤희에게〉(2019) 등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배우, 성유빈이 다빈을 묵묵하게 연기하는데. 어떻게 캐스팅하게 되었나?
구체적인 이유보다는 그와의 첫 만남이 계속 떠올라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성유빈 배우를 처음 만난 곳은 합정의 한 카페였다. 카페를 둘러보며 이 자리가 나을까 저 자리가 나을까, 좋은 첫인상을 주기에 어떤 곳이 적절할까, 고민했던 것이 기억난다. 많이 긴장해 있던 상태였지만 처음 대면한 그는 그러한 긴장감을 한번에 해소시켜 주었다. 서로 많은 질문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의 입에서 이따금씩 나오는 말들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고, 무엇보다 나를 신뢰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절제된 무표정이 그를 어른스럽게 보이게 하면서도 이따금 시시껄렁한 농담을 할 때 어린아이처럼 웃는 언밸런스한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후 성유빈 배우와 호흡을 맞췄던 시간들은 내가 전에 배우들에게 느꼈던 부담감을 많이 덜어 내는 시간이었다. 디렉션이 다른 방향으로 나갈 때면 솔직하게 되묻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 모습에 감사했다. 시나리오에서 풀리지 않았던 감정선을 그가 표현하는 순간 손쉽게 해결이 되는 때도 있었는데, 그러한 지점들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다빈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는데 감독인 내가 이를 제한하고 있구나, 하고 씁쓸한 기분을 느꼈던 적도 있다.
다빈은 모범생이지만 일반적인 모범생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캐릭터 설정은 어떻게 했나.
나는 다빈이 특별한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알던 학창시절의 모범생들은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영역에서 완벽하진 않았던 것 같다. 매번 전교 1등을 하면서도 전교 2등의 오답 노트를 몰래 찢는 아이도 있었고, 편의점에서 불필요한 물건을 습관적으로 도둑질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리고 가정에 부담이 되는 구성원이 있고, 보이지 않는 계급 속에서 자격지심을 느끼는 것 역시 굉장히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피드백은 이 영화를 통해 세상에 어떤 화살을 던지고 싶냐는 것이었다. 그 말이 유독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평범한 아이가 왜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 뚜렷한 이유를 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항상 세상 속에 있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지금의 세상은 과거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각박하고 병든 곳이다.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 특별해 보이는 이상한 시대다. 특별하지 않은 성장에 어떤 이유와 차별점을 덧붙이기보다 그것이 멈추어지지 않게끔 믿어 주고 응원하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고자 했다.
영화 말미, 겨울 산자락을 걷던 다빈이 해를 마주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어떤 걸 의도했나.
앞서 말했듯 소년의 성장이 특별하게 느껴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내게 다빈이 커서 어떤 어른이 되었을 것 같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가 우리 주변에 평범하게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회사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막 문을 연 식당의 매니저가 되었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러한 개개인이 특별한 이유는 타인에게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과거의 흔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빈이 친구 정원의 죽음에 대해 뚜렷한 해소를 하지 못하였듯, 나 역시 마음 한구석에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과거로 끌어들이는 상처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것을 최대한 무디게, 혹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려 애쓰는 과정을 성장이라고 한다면 그 행위 자체는 지극히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다빈이 살면서 더 큰 상처를 받을지라도 지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에 아파하고 몸부림치다 결국 체념하는 과정을 겪는 것만으로도 자연의 섭리나 신의 의지처럼 불가해한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최대한의 반응을 한 것이라 생각하며, 극 중 인물이 말하는 것처럼 너 자체만으로 괜찮고,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 주고 싶다. 이러한 지점들 때문에 다빈이 세상의 절반을 내리쬐는 거대한 자연물을 바라보며 세상 누군가는 자신과 비슷한 고민들을 안고 살아가겠구나 짐작하고 안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그것을 영화에 담아내려고 했다.
영화 혹은 드라마로 다루고 싶은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면?
예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숙종 시대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외딴 산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영화 시나리오로 조금씩 써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