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색무취 Colorless, Odorless 감독 이은희 LEE Eunhee | Korea, Taiwan | 2024 | 55min | Documentary | 한국경쟁 Korean Competition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망 노동자 故 황유미 씨의 작업 노트에서 시작하는 〈무색무취〉는 아카이브 자료와 인터뷰, 현장 취재 등을 꼼꼼하게 엮어 만든 다큐멘터리이다. 국내 반도체 산업재해 피해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한국을 넘어 대만으로 이어지며 ‘글로벌’ 기업들의 횡포와 이들에 맞서 싸우는 이들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단편 〈핫/스턱/데드〉(2021), 〈머신 돈 다이〉(2022)를 비롯해 미술관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비디오 작업을 해왔다. 영상 아티스트로서 지금껏 기술 환경, 현대 기술의 메커니즘 등을 주요 관심사로 두었다. 기존의 작업 세계에 견주어 봤을 때 〈무색무취〉는 어떤 공통점과 차별점을 갖고 있는가.
이전부터 다뤄 왔던 관심사와 주제의 연장선에서 〈무색무취〉를 만들게 되었다. 경제적 체계를 중심으로 발전해 온 기술 환경 속에서 손상된 몸, 그리고 그 손상을 다시 기술을 통해 회복하거나 회복하지 못하는 사회적 현상들에 대해 고민하며 영상 작업을 이어 왔었다. 〈무색무취〉는 이러한 손상이 발현되는 사건으로서, 기술산업 내에서 발생하는 산업재해를 조명하고자 했던 작업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현장 조사가 필수적이었고, 그 과정에서 만난 피해자와 활동가 들의 이야기를 잘 담아내고 싶어졌다. 특별히 비디오 아트와 다큐멘터리의 장르적 구분을 염두하고 작업한 것은 아니다. 〈핫/스턱/데드〉 〈머신 돈 다이〉, 그리고 개인전 《피로의 한계》(2023)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업 활동은 기계의 생애와 쇠퇴를 중심적으로 다루었는데, 그보다 앞선 개인전 《회생비용》(2020), 《디딤기와 흔듦기》(2021)는 기술과 노동, 그리고 신체의 장애가 맺는 상호 보완적 관계를 여러 현장 조사를 통해 탐구한 작업들이다. 현대 기술과 그 기술을 만들어 내는 생산 환경, 노동자의 몸과 건강권, 자본주의 착취는 내 작업에서 계속해서 다루고 있는 중요한 화두이다. 〈무색무취〉는 매년 다양한 국적의 비디오 아티스트를 선정해 작품 제작을 후원하는 스페인의 한네프켄스재단의 지원으로 시작되었다. 일반적인 미술관의 커미션보다 상대적으로 긴 제작 기간이 주어졌고, 싱글 채널 영상이라는 형식 외에는 주제나 내용 면에서 어떠한 개입도 없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보다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겠다는 생각과 다짐이 들었다. 이전 작업에서는 공장이나 연구실 환경을 직접 방문하여 촬영하거나 산업 관련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면, 〈무색무취〉는 그러한 환경 자체를 담아낼 수 없는 조건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직업병 피해자 당사자들과 활동가들의 증언이 더욱 중요했고, 이를 담아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영상의 형식이 다큐멘터리에 가까워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는 한국뿐 아니라 대만의 산업재해 피해자들의 목소리 또한 담고 있다. 영화가 다루는 기업들의 경우 글로벌 기업체인 만큼 다수의 피해 지역이 있을 텐데, 한국과 함께 특별히 대만에 주목한 이유가 있을까.
한국과 대만은 글로벌 전자산업 공급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국가들이다. 두 나라의 삼성과 TSMC 같은 대표적인 전자 기업들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성장해 왔고, 이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 또한 다층적이다. 경제 발전과 국가 안보를 위해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내해야 한다는 시대적 관행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과 대만은 모순적인 위치에 놓여 있으며, 그렇기에 더욱 이 문제를 책임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이에 저항하는 활동가들과 산재 피해자들의 활동이 비교적 오랜 기간 이어져 왔고, 그 영향력 또한 크다. 반면 작업을 위해 베트남으로 아웃소싱된 전자산업 환경에 대한 취재를 위해 그곳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협력하던 현지 시민단체가 정부의 집중 감시를 받게 되어 결국 무산되었다. 이에 비해 한국과 대만의 활동가와의 협업은 물리적으로 가능했다.
피해자들의 육성을 직접 전할 수 있는 인터뷰는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식이다. 〈무색무취〉가 특별한 건 이들 인터뷰 사이사이에 사진, 기록물, 데이터 등의 영상 푸티지를 조합해 넣었다는 점이다. 인터뷰와 푸티지 영상 등을 교차해 배치하는 구성은 어떻게 떠올리게 됐나.
앞서 말했듯이 이번 작업에서는 산업 현장을 직접 조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반도체 생산 공장은 영업 기밀을 이유로 외부인의 출입이 전면 제한되어 있다. 심지어 공장의 노동자들에게도 그렇다. 스마트폰을 들고 들어갈 수도 없고, 공장에서 사용되는 화학 물질에 대한 정보도 공평하게 공유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장의 위험을 어떻게 드러내거나 시각화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작업에서 가장 큰 도전이자 핵심이기도 했다. 동시에 인터뷰 대상자들의 이야기가 단순한 피해자 증언으로만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작업에 참여해 주신 분들은 회사로부터 압력이 들어올 수도 있음에도 더 이상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했고, 직접 투쟁에 나서기도 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다르게 상상되거나 공감될 수 있도록 이를 백업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싶었다.
영화에 사용된 여러 영상 및 기록 자료 수집은 어떻게 했나. 제작 과정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면?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망 노동자 황유미 씨의 이야기는 사진과 그가 남긴 노트로 영화에 담겼다. 그 외에 생존해 계신 피해자들도 다수 등장하는데, 이들과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의 권영은, 이종란 활동가의 도움이 이번 작업에서 매우 컸다. 2007년 고(故) 황유미 님의 사망 이후, 수많은 반도체 산업 피해자들의 제보를 받으며 산업 환경 개선과 노동자 건강권을 위해 꾸준히 활동해 오신 분들이다. 처음 자문을 구하기 위해 반올림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두 분은 나를 여러 활동에 불러 주었고, 정향숙 님과 같은 피해자이자 이제는 활동가가 되신 분들과의 연결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이를 통해 TAVOI(대만산재희생자협회)를 비롯한 여러 국제 시민단체와도 연결될 수 있었다. 대만에서는 TAVOI 활동가와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 노동자 협의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취재가 진행되는 사이 TIWA(대만국제노공협회)를 통해 현재 대만 전자산업에 종사하는 이주민 노동자들과 인터뷰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여러 참여자들이 본인의 이야기와 활동 기록물을 기꺼이 공유해 주었다. 심지어 희귀병 수술 전후 찍힌 자신의 MRI 기록을 CD에 담아 제공해 주시기도 했다(그 이미지가 작업에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작품을 보시면 아실 수 있다).
이미지는 물론 사운드 디자인이 매우 인상적이다. 영상에 들어간 현장음을 비롯해 베이시스트이자 작곡가인 노디의 음악이 적재적소에 사용된다. 음향 혹은 음악의 어떤 점을 부각하고 싶었는지도 궁금하다.
음악가 노디와의 협업은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그는 모듈러 신시사이저를 활용해 전자 사운드를 만들어 내는데, 공연에서는 거대한 모듈형 장비들 앞에서 이들과 연결된 케이블을 이리저리 조작하며 소리를 생성한다. 이 물리적 방식과 행위가 작업의 주제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또 모든 영상 편집이 완성된 후 음악을 덧입히는 방식이 아니라, 작업 초반부터 함께 주제에 대해 깊이 이야기를 나눈 뒤 여러 개의 데모곡을 받아 그 음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진행한 부분도 있었다. 〈머신 돈 다이〉를 포함해, 이번 〈무색무취〉에 사용된 음악은 노디의 앨범으로도 발행될 예정이니, 나중에 들어 보시길 추천 드린다.
미술계에서 영상 비디오 작업 등이 일반화되면서 영화관과 미술관을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미술 분야를 기본 바탕으로 작업하는 아티스트로서 ‘무빙 이미지’의 시대에 해보고 싶은 역할과 프로젝트가 있다면?
형식보다는 주제가 중요한 작업을 하기 때문에, 그저 앞으로의 창작을 지속할 수 있는 영역이라면 어떤 곳이든 환영이다. 가지고 있는 스킬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의 소통 창구 역할을 해보고 싶기는 하다.
영상 작업으로 다루고 싶은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일까?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동안 새로운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단체전을 통해 선보일 예정이다. 이 작업은 〈무색무취〉와 마찬가지로 전자산업 내 드러나지 않는 산업재해에 대한 문제를 다루며 활동가 및 직업병 당사자와 협업하고 있지만, 인터뷰나 현장 기록 대신 퍼포먼스와 다양한 이미지 연출을 시도했다. 기술정치적 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를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고 흥미롭게 관객들을 설득하고 이슈를 넓게 알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며 작업을 이어 갈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