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0 감독 박준호 PARK Joonho | Korea | 2025 | 124min | Fiction | 한국경쟁 Korean Competition
남한 생활 8년 차. 이곳에서 철준(조유현)의 공동체는 탈북자 친구들 그룹과 게이 커뮤니티로 구성돼 있다. 술 번개에서 만난 영준(김현목) 덕에 종로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며 두 공동체의 중심추가 게이 커뮤니티 쪽으로 기울지만, 사소한 오해로 인해 철준은 어느 곳에도 쉽게 마음 붙이지 못한다. 오늘날 남한 게이 커뮤니티의 풍경을 기록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3670〉에는 종로3가를 중심으로 한 LGBT 커뮤니티의 모습이 생생하다. 암호 같은 제목 ‘3670’도 이곳의 은어 같은 것. 구체적인 뜻은 영화 안에 숨겨져 있다.
게이 정체성을 가진 탈북 청년의 한국 정착기를 그린 〈3670〉은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3670〉의 기본적인 스토리는 2017년에 처음 구상했다. 당시 탈북자를 주인공으로 한 세 편의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썼고, 〈3670〉은 그중 두 번째 이야기였다. 〈3670〉은 탈북자의 시선을 통해 남한 게이 커뮤니티를 조명하는데, 그 과정에서 탈북자와 시스젠더 성소수자가 공유하는 소수자성에 주목했다. ‘인종’이나 ‘젠더’ 정체성의 경우에는 그것이 외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숨길 수 없는 반면, 탈북자와 시스젠더 성소수자는 자신을 ‘위장’할 수 있다.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이러한 위장은 어쩌면 필연적인 생존 전략이 되기도 한다. 소수자로서의 공통된 경험을 지닌 두 커뮤니티가 작동하는 방식이 유사하다고 느꼈고, 영화 속에서 그들을 병치하고자 했다. 특히 〈3670〉을 통해 남한의 게이 커뮤니티를 조명하고 싶었다. 대한민국에서 성소수자는 법적·제도적으로 사실상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게이 커뮤니티는 나름의 역동적인 문화를 갖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교류하고 있으며, 술 번개나 동갑 모임처럼 다른 문화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유산이 미디어에서 충분히 재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늘 아쉬움이 있었다. 힘든 현실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LGBT 커뮤니티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2024년 당시의 게이 커뮤니티 풍경을 카메라에 기록하고 싶었다.
전작인 단편 〈은서〉(2019)에서도 북한 이탈 주민의 삶을 조명했다. 이들의 삶을 계속해서 주목하는 이유는?
탈북자에 대한 관심은 영화 작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갖고 있었다. 과거 ‘자유터학교’라는 기관에서 3년 동안 탈북 청년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 학생들에게 들었던 다양한 삶의 이야기가 큰 자양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을 영화로 풀어내는 일은 상당히 주저되는 일이었다. 친숙한 만큼 조심스러웠고, 제대로 다뤄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다. 하지만 기존 매체에서 탈북자 캐릭터가 소비되는 방식에 아쉬움을 느껴 왔고, 결국 용기를 내기로 했다. 탈북자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전형성을 극복하고,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조명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북한에서의 고난이나 탈북 과정과 같은 ‘과거’로만 규정된 인물들이 아닌, 남한에서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현재’의 인물들을 그리고자 했다. 앞으로 계속해서 탈북자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제는 한 관객으로서, 탈북자 감독이 만든 영화를 하루빨리 만나 보고 싶다.
〈3670〉을 위해 새터민의 삶은 물론 게이 커뮤니티에 관한 취재도 상세히 이루어졌을 듯하다. 시나리오 집필을 위한 자료 조사 등은 어떻게 했나.
특별한 취재나 자료 조사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저 주변을 돌아보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시나리오를 완성한 후에는 세부적인 부분만 자문을 받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특히 북한 사투리와 말씨를 자연스럽게 재현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주인공 철준이 남한에 온 지 8년이 된 설정이기 때문에 미디어에서 일반적으로 접하는 북한 사투리보다는 내가 실제로 보고 들었던, 조금은 남한화된 북한 사투리를 영화에 담아내고 싶었다. 이를 위해 실제 그런 사투리를 잘 구사하는 유튜버 이광명 님께 연락을 드렸고, 영화 속 모든 탈북자 배역의 배우들이 그분께 사투리 수업을 받았다.
탈북 청년 철준을 연기한 조유현 배우가 인상적이다. 북한 사투리 연기부터 감정 표현에 서툰 투박한 게이 청년의 내면까지 잘 표현하고 있는데, 캐스팅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탈북자 게이라는 캐릭터의 설득력을 갖추면서도, 순박하면서 강직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배우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철준 역을 캐스팅하기 위해 약 6개월 동안 수많은 배우들을 찾아보고 직접 만나기도 했다. 오랜 캐스팅 과정에 지쳐 가던 중 2021년 서울독립영화제 배우 프로젝트인 ‘60초 독백 페스티벌’ 예심 영상에서 조유현 배우를 발견했다. 이미지가 잘 부합한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시나리오를 전달하고 리딩을 진행했다. 간증문을 읽었던 순간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데, 조유현 배우의 덤덤한 목소리와 섬세하게 떨리는 표정이 장면에 설득력을 부여했고, 텍스트가 배우의 신체를 넘어 캐릭터로부터 울려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록 영화 경력은 많지 않았지만 이미지와 연기,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 본연의 모습이 철준을 담아내기에 충분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역할을 제안하게 됐다.
철준의 절친, 영준 역의 김현목 배우는 질투와 시샘, 열정과 냉소 등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는 역을 훌륭히 소화한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스테레오타입의 게이에 가까운 연기를 보여 주는데. 철준과 영준 캐릭터 설정은 각각 어떻게 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김현목에게 기대한 것은 무엇인가.
철준은 남한 사회에 적응하려 노력하면서도 자신을 당당히 지켜낼 줄 아는 강직하고 안정적인 인물이다. 반면 영준은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을 사회에 끼워 맞춰 살아왔다. 그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으며, 밝고 활달한 겉모습 뒤에 쉽게 상처받는 불안한 내면을 감추고 있다. 영준이 내뱉는 말들은 종종 겉으로 드러나는 의미와 다르다. 그의 대사는 항상 숨겨진 의도를 품고 있으며, 때로는 표면적인 의미와 정반대의 감정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런 미묘한 서브 텍스트를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고, 애초에 외적으로도 그런 분위기를 지닌 배우를 찾고 싶었다. 겉으로는 누구보다 밝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보이지만, 한 꺼풀만 벗겨 보면 속이 문드러져 있을 것 같은 얼굴 말이다. 김현목 배우를 처음 본 건 오래전 다른 현장에서였다. 최근 코믹한 역할을 주로 맡아 왔는데, 이번 영화를 통해 그 이면의 어두움을 깊이 있게 표현할 기회가 되길 바랐다. 워낙 능숙하고 유연한 배우였기에, 영준이라는 캐릭터의 복잡한 내면을 누구보다 잘 그려 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영화 전체 이야기의 중심은 새터민 공동체와 종로3가를 중심으로 한 게이 커뮤니티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적으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기본적으로 모든 촬영은 실제 로케이션을 섭외해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게이 커뮤니티 신에 등장하는 술집, 바, 클럽 등은 모두 실제 운영 중인 공간들이다. 우려와 달리 모든 사장님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신 덕분에, 다양한 장소를 카메라에 담아낼 수 있었다. 게이 커뮤니티의 풍경이 해가 다르게 빠르게 변해 가고 있어서, 2024년 2월 촬영 당시의 풍경을 충실하게 기록해 두고 싶었다. 실례로 이태원 모스크가 보이는 루프탑 장면을 촬영한 게이 바는 촬영 이후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결국 루프탑 장면과 거울 단체 셀카 장면은 영화 속에만 남게 되었다. 특히 중요한 공간인 종로3가 포차거리도 공들여 담아내려 했다. 시간대마다 달라지는 역동적인 거리 모습을 다양하게 포착하려고 노력했지만 거리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촬영해야만 했어서 돌발 상황이 많았다. 탈북 교육기관 역시 실제 공간을 섭외하고 싶었지만, 영화의 소재 때문인지 모든 곳에서 촬영을 거절당했다. 오두산 통일전망대는 전작인 〈은서〉에도 등장하는 곳인데,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공간이라 다시 한 번 영화에 담게 되었다.
전체 프로덕션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해 준다면?
2023년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예술영화 장편제작지원작에 선정되면서 영화 제작이 본격화됐다. 7월부터 캐스팅 작업을 시작했고, 프리 프로덕션은 11월에 돌입했다. 촬영은 2024년 1월 말부터 2월까지, 총 21회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촬영에는 알렉사 35(ALEXA 35) 카메라를 사용했다. 촬영 후 4개월 동안 1차 편집을 마쳤고, 마침 운이 좋게도 9월에 배급사 엣나인필름과 함께하게 되었다. 이후 한차례 편집을 수정한 뒤, 2025년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을 앞두고 후반작업을 마무리했다. 영화 음악은 이수빈 음악감독이 총괄했고, 특히 영화 중반부에 강렬하게 등장하는 클럽 음악은 2024년 한국대중음악상 일렉트로닉 노래 부문 후보였던, 뮤지션 기나이직 님께 의뢰해 별도로 제작한 것이다.
탈북민, 성소수자 모두 우리 사회의 약자에 해당한다. 이들의 삶을 그릴 때 유의해야 할 지점이 많았을 것 같은데. 특히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이들의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표현하기 위해 특별히 노력한 지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소수자 캐릭터를 단지 ‘소수자’라는 틀에만 가두는 것이 바로 소재주의의 오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인물들을 단순히 ‘약자’로만 규정하고 약자 정체성만을 부각시켜 그 약자성을 이야기의 다른 목적에 복무시키거나 감정을 유발하는 데 이용한다면 그게 바로 ‘소재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수자들을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어 관객에게 감정적 해소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도덕적 부채의식을 더는 명분을 제공하는 방식은 소재주의가 가장 부정적으로 사용된 예가 아닐까 싶다. 탈북자와 성소수자 집단 모두 내게 꽤 친숙한 편이었음에도, 영화 작업 내내 소재주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인물을 소수자로 대하기 이전에, 다양한 측면을 가진 한 개인으로 그려 낸다면 소재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소수자의 전형성’을 넘어 인물을 복잡하고 개별적인 인간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주인공 철준은 극적 주인공으로서 인간적 연민을 자아내면서도 지나치게 ‘불쌍하게’ 보이지 않도록 주의했다. 많은 약자 주인공을 다룬 영화에서 주인공들을 온갖 불행한 설정으로 범벅시켜 놓는 경우가 많은데, 〈3670〉에서는 오히려 철준을 영준보다 경제력도 있고, 생활력도 갖춘 인물로 설정했다. 실제로 내가 만나 왔던 이들 가운데 그런 훌륭한(?) 분들이 많았기에, 한정된 탈북자 캐릭터 풀에 새로운 캐릭터 설정을 추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또한 관객들을 지나친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감에 세심한 신경을 썼다. 감정 이입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카메라가 인물에 가까이 다가서기보다는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인물과 상황을 함께 포착하려 했다. 카메라가 인물과 가까워져야 할 경우에도, 인물의 정면보다는 뒷모습이나 옆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2.39:1이라는 넓은 화면비를 사용한 것도 카메라와 인물 간의 거리감을 유지하고, 철준 개인에게 집중하기보다 철준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인물들과 상황을 동시에 조망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