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어를 끄는 소녀 Sua’s Home 감독 윤심경 YUN Simkyoung | Korea | 2025 | 110min | Fiction | 한국경쟁 Korean Competition
양부모에게 버려져 갈 곳 없는 열다섯 소녀 영선(최명빈)은 테니스 훈련 파트너 자격으로 또래인 수아(문승아)의 집으로 들어가 생활하기 시작한다. 수아가 가진 환경이 마냥 부러운 영선은 어느 순간부터 이러한 동경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목표를 향해 직진하는 영선의 고군분투는 영선을 어디로 데려갈까?
전작인 단편 〈우리 집에 온 아이〉(2022)에서도 좋은 집, 다정한 부모를 동경하고 시기하는 아이가 등장한다. 이러한 소재에 매혹을 느끼는 이유가 있을까? 〈캐리어를 끄는 소녀〉는 어떻게 구상했나?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의 어느 집에, 한 아이가 잠깐 들어와 살다가 진짜 부모에게 돌아간 일이 있었다. 또래였던 나는 그 아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속사정까진 알 수 없었기에 그 일화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2020년 즈음에 그 일화가 갑작스럽게 떠올랐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게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던 시기였다. 기회가 오기만을 바라고 있던 나와는 달리, 상황을 뚫고 나아가는 판타지적 인물을 만나고 싶었다. 아마도 이러한 내면의 열망이 꽤나 대범한 시도를 했던 오래전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단편 〈우리 집에 온 아이〉와 장편 〈캐리어를 끄는 소녀〉다. 한 뿌리에서 시작된 이야기이고, 길이에 따른 변주만 있을 뿐 결국 같은 이야기다.
테니스 훈련 파트너인 영선과 수아는 우정을 비롯해 시기와 질투 등 서로에게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두 역할을 맡은 최명빈, 문승아의 연기 대결이 돋보이는데.
영선을 생각하면 가장 큰 감정이 ‘분노’였고, 그 분노는 ‘열심히 노력했는데, 나는 왜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까’에서 비롯된다. 최명빈 배우의 시크하고 뚱한 표정을 담은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는데, 그 자체가 영선의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내공을 쌓아 온 배우였기에 작품 해석력과 연기에 있어서도 믿음이 있었다. 수아는 영선에 비해 그 또래 아이에 더 가깝다. 하지만 부모에게 억눌려 있고, 강한 척하지만 툭 치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는 아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아도 영선만큼 아슬아슬한 선을 타는 캐릭터다. 여리고 불안정한 면모를 보여 줄 수 있는 생동감 있는 배우, 절제와 응축으로 가득 찬 이야기의 폭을 흔들어 줄 매력적인 배우가 필요했다. 미팅을 통해 만난 문승아 배우는 꾸밈없는 매력과 생동감을 가진 중학생이자 배우였고, 그 자체로 작품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거라 믿었다.
수아의 아버지이자 불운한 사고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 성우 역의 김태훈, 약자에게 열린 태도를 가졌으나 영선의 간절함이 종종 부담스러운 수아 엄마 지영 역의 유다인 배우도 반가운 얼굴이다.
성우는 멈추지 않는 빨간 구두에 올라탄 인물이다. 자신의 인생이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다 끝난 걸 알면서도 딸인 수아를 내세워 코트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김태훈 배우가 가지고 있는 가볍지 않은 눈빛과 얼굴에 흐르는 정서, 뜨거운 내면 에너지, 내공 있는 연기력이 성우의 ‘혼란한 내면’, 나아가 ‘조용하지만 폭발적인 에너지’를 잘 표현해 줄 거라고 믿었다. 지영은 집을 지배하는 성우와 수아 사이에서 억눌려 있는 캐릭터다. 성우와 수아가 테니스라는 공통 분모로 그들의 세계를 만들어 갈 때, 동떨어져만 갔던 지영은 무언가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유다인 배우는 첫 미팅 때부터 시나리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투명한 얼굴과 비밀을 담고 있을 것 같은 눈빛, 흐트러짐이 없으면서도 쿨한 텐션이 있는데, 이런 면이 외롭고 굳어 있는 지영을 대변하면서도, 답답하게 보여질 수 있는 지영에게 생기를 심어 줄 거라 믿었다.
양부모의 사업 실패로 쉼터에서 생활하게 된 영선이 수아의 가족에게 점차 집착해 가는 모습은 간절한 동시에 간혹 상당히 과격하게 그려진다. 영선의 심리를 담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듯한데. 관객이 영선의 상황과 심정에 동의할 수 있도록 어떤 것을 강조하고 싶었나.
영선의 상황과 심정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 친절하게 전시하는 방식은 택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불친절하고 건조하더라도 궁금증을 가지고 캐릭터를 만나길 바랐고, 끝날 때쯤 되었을 때에야 ‘그래, 영선이 너가 많이도 절실했구나. 응원할게’ 라는 감정을 관객들이 느껴 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드러내기보다는 누르는 방식을 통해 영선의 상황에 동의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배우의 감정 연기나 표정 등에 진폭을 크게 두지 않았고, 외부 에너지보다 내면 에너지에 집중했다. 영선의 간절함은 영선의 선택과 행동으로만 보여지길 바랐고, 인물과 카메라 간 거리도 가깝지 않게 해 영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영선에게 차갑게 구는 인물들도 사실 인간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이들은 없기 때문에, 관객들이 특별히 영선의 편에 설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하는 영선이가 딱 오늘만큼의 우리 모습과 같다면, 영선에게 동의가 될 거라 생각했다.
영선과 수아를 잇고 또 이들 사이를 가로막는 것 모두 테니스다. 영화의 주요 소재로 테니스를 선택한 까닭은?
말 그대로 영선과 수아 가족을 잇는 매개체가 필요해서다. 한데 이왕이면 무형의 감정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가시적이고 동적인 요소’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아무것도 없는 외로운 영선의 상황과 감정을 부각시켜 줬으면 했기에, 자기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지만 할 수 있는 것인 동시에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길 바랐다. 자연스럽게, 스포츠라는 카테고리에서 테니스가 떠올랐다. 라켓이 공을 때릴 때 나는 ‘탕!’ 소리와 테니스공의 무게감 및 무브먼트가 주는 심상까지, 영선의 캐릭터와 잘 맞아떨어진다.
최명빈과 문승아, 두 배우 모두 테니스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 같다. 테니스 연습 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두 배우의 어떤 노력이 있었나. 또한 테니스 경기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두 배우 모두 3~4개월 정도 일대일 테니스 레슨을 받았다. 운동 신경이 좋고 악바리 근성이 있어서 테니스가 어려운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 빠르게 기본기를 다졌다. 테니스 장면 연출을 위해서 특히 신경 쓴 것은, 랠리가 가짜처럼 보이지 않게 담아내면서도 우리 영화가 테니스 영화가 아니라는 본질을 되새기는 것이었다. 랠리의 현실감과 진정성을 살리기 위해 테스트 촬영을 통해 실제 테니스 촬영에서의 오차를 줄이고, 현장에서는 테니스 코치와 테니스 ‘능력자’인 스태프의 도움으로 움직임의 속도와 시선, 자세 등의 고증과 디테일을 잡으려고 했다. 약속된 패턴과 그에 따른 동선을 몸에 익히는 리허설, 후반작업 과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테이크를 확보하는 것에도 집중했다. 하지만 경기 장면 구현에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경계했다. 배우들이 경기 장면을 찍으며 지치면, 진짜 집중해야 하는 드라마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운동성이 있는 장면과 드라마(감정) 구간을 나누어 촬영을 진행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신경 썼던 부분이다.
개인 테니스장을 갖추고 있는 수아의 집은 고급스러운 동시에 차가운 인상을 풍긴다. 로케이션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집의 경우, 여백이 있고 계단이 있는 이층집이 필수였다. 수아 가족 자체가 서로 심리적 거리감이 있는데다 텅빈 존재들 같은 면이 있기에 집 구조가 이를 반영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선에게 수아의 집은 매력적으로 보이는 면모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실내 인테리어가 차가운 대리석 혹은 모던한 무채색이 아닌 것, 고급스러운 느낌을 갖고 있는 이유다. 집에 계단이 있고 없고도 중요했다. 촬영에서 삭제되었지만, 영선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영선과 수아 가족 사이에 넘지 못하는 ‘계급’ 혹은 ‘선’이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실제로 촬영이 이루어진 집은 이 같은 기본적인 요건을 충족하면서도 활용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많았다. 긴 계단과 깊이감 있는 이층 복도, 널따란 정원, 성우의 별채 등이 그랬다. 이 집에 깊숙이 들어가길 바라는 영선의 욕망과, 집을 지배하는 성우를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확신했다. 어둡게 닫혀 있는 내면적인 공간이 ‘집’이라면 ‘테니스 코트장’은 밝고 열려 있는 외부적 공간이다. 집이 정적이라면 테니스 코트장은 동적 요소를 보여 줄 수 있는 대비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코트장은 성우가 만든 세계다. 장소를 선택할 때 첫 번째로 주안점을 둔 것은 프라이빗한 공간처럼 보이는가였다. 하지만 코트장은 영선에게 있어서 그게 어떤 것이든 ‘꿈’을 키우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햇빛도 들고, 넓고, 색도 있고, 마냥 차가운 공간으로만 비춰지지 않는 곳을 선택하고 싶었다.
전체 프로덕션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좀 더 상세히 설명한다면?
로케이션의 난이도가 있었고 배우의 테니스 훈련 등도 필요했기에 프리 프로덕션이 3~4개월 정도로 꽤 길었다. 촬영은 총 24회차로 스케줄에 딱 맞게 끝났고, 주 촬영지는 서울과 양평, 양구, 담양 등이었다. 편집 과정에서 걷어 내는 과정이 끝없이 이어졌다. 감정을 다루는 이야기이고 대단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상황이나 감정이 관객들에게 애매하게 다가갈 수 있는 부분들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잘 살아내고 싶은 간절함. 영선이의 생의 의지’가 깃대라고 생각하며 여기에 집중해 모래성 게임을 하듯 나머지를 걷어 냈다. 솔직히 궁금하다. 더 가져올 모래가 남은 건지, 꽂은 깃발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는지.
영화 혹은 드라마로 다루고 싶은 또 다른 주제가 있나?
‘사랑’, 그리고 ‘인생,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한 이야기를, 무겁지 않은 톤으로 다뤄 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