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 CHANG GYEONG감독 이장욱 LEE Jangwook | Korea | 2025 | 19min | Experimental | 영화보다 낯선 Expanded Cinema

이장욱 감독은 필름의 물질성과 우연성을 탐구하며 독자적인 영화 언어를 발전시켜 온 작가다. “필름은 익숙한 매체이기도 하지만, 매우 낯선 경험을 동시에 제공한다”고 말하는 이장욱 감독에게 필름은 미지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탐구의 대상이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여러 시기의 작품들이 소개되는 가운데, 그의 영화적 여정과 작업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1998년 작인 〈echoed silence〉부터 최근작인 〈창경〉과 〈광합: 파트1〉까지 시간적 간격이 큰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필름을 기반으로 작업을 계속하면서 영화적 관심사가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그리고 이 작품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돼 있으며 전체 작품 세계 안에서 어떤 흐름을 보여 준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echoed silence〉는 1998년 작업이고 〈오후풍경〉은 2013년에 만들어졌지만 작업에 사용된 필름은 역시 1998년경 찍힌 것이다. 그 무렵은 시카고에서 대학원을 다닐 시기였는데 내러티브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오후풍경〉은 원래 강한 내러티브 구조를 의도했으나, 배우가 하차하며 촬영본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 푸티지를 15년 후에 다시 보게 돼 옵티컬 프린팅 등을 통해 재구성했다. 이 두 작업은 관습적 내러티브와 나만의 고유한 표현 방식 사이에서 혼란을 겪던 시기를 반영한다. 〈echoed silence〉를 보면 강박적으로 분절하려는 게 보이기도 하고, 작업할 당시에는 못 느꼈지만 고유한 목소리에 대한 과잉된 갈망이 보이기도 해서 조금 민망할 때도 있다. 그 후 〈기억의 표면, 표면에 대한 기억〉(1999)이란 작업을 기점으로 고유한 목소리를 내는 영화를 만들어 왔다. 〈동면〉(2007)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여 준다. 최근작 〈창경〉은 이전의 작업들과 비교하면 약간은 이례적이다. 이전의 작업들은 대부분 무성영화였는데, 〈창경〉은 제한적으로 소리를 사용했고, 텍스트를 사용한 것도 처음이다. (〈선데이 서울〉(2015)이라는 작업에서 잡지를 낭독한 적이 있긴 하다.) 또한 내러티브에 대한 관심으로 다시 선회했지만, 초기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 작업도 간헐적으로 해왔다. 〈광합: 파트1〉은 작년 이민휘 음악감독과 함께했던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 〈광합: 프롤로그〉의 연장선에 있다. 필름이 빛을 합성하여 만들어지는 과정을 광합성에 은유적으로 비유한 작업이다. 〈창경〉의 경우도 전시와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로 시작해서 완성한 작업이다. 영화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퍼포먼스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 개의 다른 작업 방식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정거장〉은 개인적으로 이 노래(이민휘의 ‘정거장’)를 좋아해서 허락을 받고 만들어 본 뮤직필름이다. 처음으로 음악을 기반으로 한 작업을 해서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 작업만큼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것이 두려운 건 처음인 것 같다. 이 모든 작업의 중심에 필름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내게 필름은 익숙한 매체이기도하지만, 매우 낯선 경험을 동시에 제공한다. 나는 매번 발생하는 이런 미스터리한 경험을 좋아하는 듯하다. 그래서 결과가 불투명하고 안갯속 같은 작업으로 이끌어 가기에 좋은 매체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디지털 기술이 영상 생산과 소비의 주류가 된 현재, 필름 매체를 고수하는 행위는 단순한 기술적 선택을 넘어 정치적·미학적 입장으로 읽힐 수 있다. 필름 작업이 점점 더 희소해지고 ‘아티스틱한 제스처’로 수용되기도 하는 현상 속에서, 필름의 어떤 특성과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필름 작업이 특별히 어떤 메시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작업을 시작할 때는 주위에 모두가 필름 작업을 하고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수가 적어졌을 뿐이다. 그저 내게 익숙하고 동시에 낯선 매체의 특성을 좋아해서 작업하는 것이다. 디지털 작업도 한두 번 해봤는데, 너무 어려워서 힘들더라. 흥미로운 매체라는 생각은 했다. 다만 내가 구축해 온 작업 환경이 필름에 맞게 되어 있어 상당한 기간 동안은 비슷하게 작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choed silence〉는 ‘컷의 해체와 재결합, 프레임의 충돌에 대한 실험’이라고 소개돼 있다. 1998년 작품인 이 초기작에서 시도한 영화적 실험과 발견들이 이후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지금의 관점에서 이 작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echoed silence〉는 내러티브가 상당한 영화다. 간단한 스크립트도 있고 등장인물도 있다. 다만 촬영 후 컷들을 프레임 단위로 해체하고 재분배하는 방식을 시도해 보았다. 그래서 영화는 깜박거리고, 빛의 움직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작업이 내게 미친 영향은 아마도 내가 이미지의 단위를 숏이 아닌 프레임, 또는 프레임 안의 더 작은 요소로 보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오후풍경〉에서는 등장인물을 촬영할 때 드러나지 않던 프레임 안의 다른 요소들이 포착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고…. 내가 찍은 필름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들었다고 할까? 그래서 〈동면〉이나 〈가을 영화〉(2014) 같은 작업에서는 즉흥 편집과 프린팅의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필름 작업 과정에서 계획한 것과는 다른 우연적 결과들이 많이 생길 것 같다. 이런 우연성과 통제 불가능성을 작업에 어떻게 수용하는지 궁금하다. 특히 〈광합: 파트1〉과 같은 퍼포먼스적 작품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어떤 역할을 한다고 보나?

나는 우연적인 것을 대폭 수용하는 편이다. 앞서 언급한 즉흥 편집의 예를 들면, 암실에 필름들을 걸어 놓고 즉흥적으로 프린팅 하면서 동시에 편집을 하는 작업을 말한다. 프린팅이 끝나고 현상을 하면 영화가 만들어진다. 기대했던 것과 다른 결과가 많이 나오게 된다. 다만 작업 전에 방법론을 결정하고 자신과 약속을 한다. 무엇이 나오든 그대로 수용한다는 식의 약속이다. 그리고 실제로 나도 극장에서 내가 만든 결과물을 처음 보는 경험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연성을 실천한 작업의 예는 〈동면〉과 〈가을 영화〉가 대표적이다. 영화를 볼 때 어떤 부분은 마음에 들고 어떤 부분은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정 작업을 하지 않고 수용하는 방식을 강제하는 것이다. 퍼포먼스의 경우 사실 매우 구조적으로 만들어 놓고 연습도 많이 하는데, 특히 타인과 함께할 때는 더 그렇다. 지난번 이민휘 감독과 함께 〈광합: 프롤로그〉를 작업할 때도 여러 번 밤 늦게까지 연습하고, 마음에 안 들면 다시 하는 과정을 거쳤다. 나는 구조와 우연의 팽팽한 긴장감을 좋아한다. 어긋남을 느낄 때 혼자 살짝 웃기도 한다. 통제 불가능한 것을 통제하려는 인간적인 긴장감… 그런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결국에는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매번 깨달으면서도 말이다.

〈정거장〉과 〈광합: 파트1〉에서는 시각과 청각의 관계가 더욱 복합적으로 느껴진다. 이미지와 소리의 충돌과 공명이 만들어 내는 효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특히 〈정거장〉에서 음악과 영상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궁금하다.

나도 음악과 함께하는 작업이 처음이라 무척 어렵고 낯설게 느껴졌다. 이민휘 감독의 음악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인데, 이질적인 요소를 덧붙이려 하니 생겨나는 부조화인 듯하다. 내가 취한 태도는 이미지의 독립성이었다. 독립된 두 개의 요소(이미지와 음악)가 만날 수 있게 주선하는 역할을 하려고 한 것 같다. 그래서 음악이 가진 고유한 완결성을 보존한 채 또 다른 장소에서 들려지는 어떤 것… 그런 비유밖에 할 수 없을 듯하다.

〈창경〉에서 유년기 기억과 역사적 인식 사이의 간극을 표현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특히 간헐적으로 들리는 사부작대는 소리가 시각적 이미지와 맺는 관계가 주목할 만하다. 이 소리는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라 기억의 촉각적 차원을 환기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감각적 기억과 역사적 인식 사이의 관계를 필름이라는 매체로 어떻게 번역하려 했는지, 그 과정에서 발견한 통찰이 있다면 이야기해 달라.

〈창경〉에서 들리는 사부작대는 소리는 내가 창경궁을 걸으며 나뭇잎 등을 밟는 소리다. 이 소리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 나오는 에피소드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교가 동물 학살을 명령받고, 동물원을 거닐며 가졌을 움직임의 템포, 강도 등을 감각화해 본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도 이 소리가 계속 남아 있는 느낌을 가졌다. 창경궁 촬영을 갔을 때, 너무 평화롭고 흔적도 없고 찍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었다. 소리는 그 평화로운 표면을 들춰 내는 작은 역할이라고 해야 할까? 텍스트를 통해 역사적인 사실에 관한 정보가 제공되지만, 개인적 기억에 대한 감각적인 정보는 통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 아마도 역할을 했다면 통로의 역할 같은 것이지 않았을까? 그 후의 둘 간의 작용은 예측 불가이다.

작품들을 보면 자연의 이미지(나뭇가지, 그림자 등)가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자연 요소들이 작업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이것이 필름의 물질성과 어떻게 공명하는지 이야기해 달라.

주위에 흔히 발견되는 것이라 그런 것 같다. 촬영을 나가면 나무나 꽃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찍을 때는 잘 모르지만, 나중에 비교해 보면 차이를 알 수 있는 사물들을 자주 찍는 편이다. 〈창경〉에서는 창경궁 촬영본에 수집한 나뭇잎 등을 접촉시켜서 이미지를 만들었다. 식물에서 나오는 화학 물질이 필름의 유제와 반응하며 흔적을 남기게 된다. 창경궁에서 죽은 동물들의 사체가 썩고, 그 토양에서 새로운 식물이 자라나고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뭇잎이나 꽃 등을 수집해 필름 표면과 접촉하게 한 이유다. 은유적인 시도이지만, 필름의 물성은 매우 구체적인 것이라 실제로 필름 표면에서 미생물들이 자라면서 이미지를 형성한 것이다. 생명 작용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계획 중인 프로젝트나 앞으로의 작업 방향에 대해 간략히 알려 준다면?

〈광합〉 작업을 계속 진행할 생각이다. 주로 빛에 대한 이야기인데 두서없이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6mm 테이프로 찍은 기록물을 편집하는 작업을 계획하고 있다. 〈동면〉에 대한 후속 작업 같은 것이다. 구체적인 작업 방향은 잘 모르겠지만, 사운드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한 탐구는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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