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의 나라에서 In the Land of Machines 감독 김옥영 KIM Okyoung | Korea | 2025 | 92min | Documentary | 폐막작 Closing Film

26회 전주국제영화제는 폐막작으로 네팔 노동자들의 삶과 시를 담은 다큐멘터리 〈기계의 나라에서〉를 선택했다. 인간을 기계처럼, 혹은 기계 부품처럼 생각하는 나라에 와 기계처럼 일하며 느낀 것들을 시의 운율에 담아 자유롭게 노래하는 이들. 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우리 사회의 민낯을, 우리 역시 고개를 들고 마주해야 할 때이다.


〈기계의 나라에서〉는 시집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삶이보이는창, 2020)에 참여한 네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더러는 네팔로 돌아갔으나 더러는 이곳에 남아 여전히 노동하며 시를 쓰고 있다”는 자막이 이 작품을 잘 설명해 준다. 이 노동자‐시인들의 이야기를 다큐로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2020년 가을, 우연히 이 시집을 만나기 이전에 이주 노동자에 대한 나의 인식은 매우 추상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시집을 보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여기 담긴 많은 시들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실, 그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의 노동비자를 받고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있는 입장에서 이들의 말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이들의 시는 어떤 말보다도 더 강력하게 한국 사회와 그 속의 삶에 대해 각자의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일상의 말이 아니라 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시의 양식이 내게는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그것은 젊은 시절 시를 썼던 내 개인적인 이력과 맞닿아 있을지 모르겠다. 직설적인 웅변보다 내성적인 시어로 이루어진 고백이 훨씬 더 통렬하게 다가왔고, 내가 느낀 그 통렬함을 영상으로 구현하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거울을 바라보듯 이주 노동자들의 시선을 통해 우리 자신을 다시 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이 작품은 노동에 대한 다큐이면서 동시에 시에 대한 다큐다. 영화를 보면 이 둘이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는 무언가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차갑고 비열한 ‘기계의 도시’에서 노동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는 마음이 시가 되고, 동시에 시는 기계가 되어버린 한국인들의 비정함과 한국 사회의 부당한 노동 현실을 폭로하는 급진적인 언어가 된다. 이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연출로서 특별히 신경을 쓴 부분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시에 대해서 흔히 오해하는 부분이 시는 ‘정서적이고 낭만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거 내가 시를 쓰던 시절,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어디 풍광 좋은 곳에 가면 누군가가 내게 “시가 절로 나오겠다”며 “시 한 수 읊어 보라”고 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시는 아름다운 것만도 아니고 아름다운 곳에서만 나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시는 삶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우리 삶이란 아름다움보다는 슬픔과 고통과 분노와, 도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더 점철되는 게 아닌가 한다. 때문에 이 다큐에서 특히 신경을 썼던 것은 시가 별도의 장식처럼 삽입되는 것이 아니라 이분들의 삶에 대한 이해와 시가 연결돼 병행되도록 구조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념해서 보면, 이분들의 여러 시가 개인적 정서에서부터 사회적 현실에 대한 조망으로 점점 확장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관객들이 꼭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장면이 있을까?

작품을 기획할 때 이 다큐의 지향을 ‘이주 노동자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을 비로소 우리가 보는 것’이라 정의한 바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분들의 인터뷰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은 몇몇 지점이 있다. 러메스 사연이 “한국인들은 에스컬레이터에서도 달린다”고 했을 때, 그리고 지번 커뜨리의 친구들이 식당에서 대화하며 “한국인들은 외국인을 기계처럼 생각한다”고 하자 다른 한 친구가 “아니, 그들은 자기들끼리도 그런다”고 했을 때. 그밖에 유념할 만한 장면은 밥을 먹는 장면이다. 딜립 반떠와는 늘 서서 밥을 먹는다. 서서 밥을 먹는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또 수닐 딥떠 라이의 공장에서도 점심 식사가 두 번 들어가는데, 이 또한 반드시 두 번 들어가야 했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여기서 말하기보다 관객들이 직접 찾아보시면 좋을 것 같다.

작품에 삽입되어 있는 두 곡의 노래가 좋았다. 이 작품이 서정적인 순간을 품을 수 있었던 건 특히 수닐 씨의 동반자가 부르는 노래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일반적으로 ‘서정적’이라고들 쉽게 생각하는 시는 오히려 강렬하고 날카로워, 이 작품을 더 강인하고 단호하게 만들어 준다. 이 노래들에 대해 이야기를 좀 더 해줄 수 있나?

영화 속에서 네팔 현지에서 어이쏘르여 쉬레스터가 부르는 노래는 그가 직접 만든 노래다. 이 노래가 인상 깊었던 것은 어이쏘르여가 네팔어 가사 속에 한국어를 섞어 쓰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한국어 문장들은 네팔 노동자들이 고용 기간 중 너무나 많이 들어서 익숙해진 문장들일 것이다. ‘돈 많이 벌어’ ‘계속 빨리’ ‘나중에 괜찮아’ ‘새끼’ ‘씨발’ 이런 말들. 노동 현장에서 범람하는 이런 말 자체가 한국 사회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고 느껴져서 영어 번역에도 이런 지점이 반영되도록 한국어 발음을 그대로 도입했다. ‘두 송이 꽃을 산 너머에’는 네팔의 국민가요 같은 노래로 가사도 아름답고 곡도 아름다워 수닐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한다. 이 노래는 수닐의 아내가 수닐에게 불러 주는 것이지만, 결국 우리 땅에 와 있는 모든 네팔 노동자들의 마음과 마음으로 흘러가는 노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출발점은 수닐의 숙소이나 밤하늘을 건너가며 그 장소성이 점점 확장되도록 장면을 설계하였다. 이방의 땅에서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는 이주 노동자들. 그들이 느끼는 고립감과 마음 깊은 곳의 슬픔은 말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을 관객이 함께 가슴으로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다큐에 등장하는 ‘공업화’에 대한 언급이 인상적이다. “기계도 기계지만, 사람도 기계가 되었다”는 지적이 매우 정확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한국 사회에 대한 이와 같은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더불어서 “결국 기계가 우리의 기회를 만들었다”는 다른 출연자의 언급을 함께 넣은 이유도 궁금하다.

한국 사회는 너무나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 효율을 위해 모든 것이 수치화되고 그 수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권장된다. 기계화는 효율 추구의 결과다. 생산 효율을 높이기 위해선 그 기계를 작동시키는 인간도 기계만큼 효율화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노동 조건은 가혹해지고 임금은 싸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장 힘들고 위험한 저임금 일자리를 외국인 노동자들이 감당하게 되었다. 지번과 친구들의 대화에서 나오는 저 대목은 자본주의 사회의 아이러니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사람에게 기계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기계가 되기를 요구하는 그 자리가 그들에게 취업의 기회를 주고 있기도 하다. 동시에 그 취업의 기회가 또다시 그들에게 기계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아이러니 말이다.

오랫동안 작가로 활동했고, 인터뷰를 진행 중인 2025년 4월에는 제작자이자 작가,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한 〈목소리들〉이 개봉 중이기도 하다. 그런데 〈기계의 나라에서〉는 직접 연출을 맡았다. 계기가 있었나? 직접 연출을 한 이유가 궁금하다.

첫 연출이라고 하는데, ‘감독’이란 타이틀이 명시적으로 붙은 경우가 처음이지 지금까지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에서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 방송 다큐든 다큐 영화든 우리 회사에서 만들어진 모든 작품은 내가 직접 취재하고 스터디해서 기획을 해왔고, 기획의 비전을 살릴 수 있는 플롯 구성과 미학적 표현 방법론을 탐구해 촬영과 편집에 반영해 왔다. 1인 제작사라 저걸 ‘만들고 싶다’는 내 자신의 욕구가 작품 제작에 있어 가장 큰 동기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내가 전면에 나서기보다 별도의 연출자를 기용하고 나는 작가 겸 CP(책임 프로듀서)의 역할을 맡아 제작을 총괄하는 방식으로 일했다. 방송 다큐 제작에서는 이것이 거의 일반적인 경우이기도 했고, 또 연출자가 있는 경우 일을 분담할 수 있어 상호 부담이 줄어드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런 협업은 연출자가 기획의 비전을 공유할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번 〈기계의 나라에서〉도 초기 연출을 의뢰한 감독이 있었지만 작품에 대한 생각이 현저히 달라 중도에 헤어지게 되었고, 시기적으로 다른 분에게 맡길 수가 없어 내가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편집까지는 늘 깊이 개입해 왔던 터라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후반작업에 있어 기술적인 공정을 직접 해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고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롭게 깨우치는 즐거움도 컸다.

물론 작품에서 충분히 이야기했고, 그 메시지가 잘 전달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관객이 이 작품에서 가져갔으면 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인가?

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참 평범한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이주 노동자들이 추상적인 집단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개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했으면 한다. 그러면 이들이 요구하는 이주 노동자 ‘인권’이 무엇인지 좀 더 실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2020년 3월 15일, 다섯 명의 이주 노동자가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이주 노동자에 적용되는 고용허가제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을 제한하고 근로의 권리 등을 제한하고 있으므로 위헌임을 밝혀달라는 것이었다. 고용허가제는 사용자 동의 없이 사업장을 옮길 수 없도록 제한해 이주 노동자에 대한 ‘강제노동’ ‘노예노동’의 주범으로 지목돼 왔다. 그러나 헌재는 2021년 12월 23일 이주 노동자 사업장 변경 제한을 합헌으로 판결했다. 뿐만 아니라 2023년 7월 정부는 사업장을 변경할 때에도 ‘일정한 권역과 업종 내’에서만 가능하도록 더욱 가혹한 조건을 부과했다. 이주 노동자들에게 있어 이 문제는 여전히 긴급한 현안이다. 사실 〈기계의 나라에서〉 편집 초기 버전에는 헌법소원 기자회견이 들어가 있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톤을 조정하면서 이런 부분들이 모두 빠졌다. 그러나 고용허가제의 이런 문제에 대해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시기를, 영화 밖에서 다시 한 번 요청드린다.